사회

[서해성의 박학다설] 세 가지 독립선언서 이야기

최은지

tbs3@naver.com

2019-01-11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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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다른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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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용 인용시 tbs <색다른 시선, 김종배입니다.>와의 인터뷰 내용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방송 : 2019. 1. 11. (금) 18:18~20:00 (FM 95.1)
    ● 진행 : 김종배 시사평론가
    ● 대담 : 서해성 작가

    ▶ 김종배 : 우리시대의 지식광대 서해성 작가 모셨습니다. 어서 오세요.

    ▷ 서해성 : 네. 안녕하셨습니까?

    ▶ 김종배 : 한 분이 지금 문자 보내드렸는데요. 그걸 그대로 읽어드리면서 시작하겠습니다. 기다렸어요, 박학다설. 자, 시작하시죠.

    ▷ 서해성 : 알겠습니다.

    ▶ 김종배 : 오늘의 주제는요?

    ▷ 서해성 : 독립선언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 김종배 : 독립선언서?

    ▷ 서해성 : 네. 거기에 숨겨있는 이야기, 우리가 잘 모르는 이야기, 이런 것들이 있을 것 같아서, 3.1운동 100주년이지 않습니까?

    ▶ 김종배 : 올해 그렇죠. 100주년 되는 해죠.

    ▷ 서해성 : 그런데 3.1운동만 100주년이 아니고, 사실은 2.1 독립선언도 100주년이고, 2.8 독립선언도 100주년이고, 그렇습니다. 기미년에는 세 가지 독립선언서가 있었습니다.

    ▶ 김종배 : 그렇죠.

    ▷ 서해성 : 그 얘기를 같이 해보고 싶은데, 사실은 2.1 독립선언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으시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사실은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이름으로 처음 선포한 독립선언입니다.

    ▶ 김종배 : 네, 2월 1일.

    ▷ 서해성 : 네. 그 날짜에 대해서 현재까지도 논쟁이 있는,

    ▶ 김종배 : 그래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대한독립선언, 정식 명칭이 그렇습니다. 대한독립선언, 이른바 만주 일대에서 발표했던 건데요.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2.8 독립선언과 3.1 독립선언, 흔히 기미독립선언이라 그러죠. 그것의 선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정부에서는 현재 그 기념일을 2월 1일을 대한독립선언 기념일로 날짜를 쇠고 있습니다.

    ▶ 김종배 : 그래요?

    ▷ 서해성 : 그런데 별칭이 이제 무오독립선언입니다.

    ▶ 김종배 : 그래요?

    ▷ 서해성 : 무오년은 이제 기미년 전을 얘기하는 것이거든요. 이렇게 부르는 이유가 뭐냐면 그 선언했던 시기가 1919년 2월이지만 음력으로는 무오년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고 해요.

    ▶ 김종배 : 음력으로?

    ▷ 서해성 : 네. 그런데 실제로는 양력으로 2월 1일, 만약에 실제로 그날 했다고 한다면 양력으로 1919년 2월 1일이 됩니다.

    ▶ 김종배 : 1월 1일?

    ▷ 서해성 : 1월 1일이 됩니다.

    ▶ 김종배 : 기미년이네, 그럼.

    ▷ 서해성 : 그러니까 기미년이 되는 거거든요. 아무튼 그런데 현재까지, 이 말은 현재까지도 대한독립선언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고 있지 못 하다라는 걸 잘 말해 주고 있는데,

    ▶ 김종배 : 날짜 하나가 지금 정리가 안 되고 있다는 얘기잖아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 김종배 : 어찌 보면 가장 기본적인 건데,

    ▷ 서해성 : 네. 대한독립선언 100주년이 되는 이참에 정부 차원에서 뭔가 이렇게 정확하게 규정해 주는 이런 일들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 김종배 : 알겠습니다. 아무튼 그런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거예요?

    ▷ 서해성 : 그 선언서를 쓴 사람은 대동단결선언, 그러니까 1917년에 바로 우리가 민주공화정으로 가야 된다는 얘기를 처음 언급하고 있는, 본격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조소앙 선생이 기초를 했거든요.

    ▶ 김종배 : 조소앙 선생.

    ▷ 서해성 : 삼균주의 하신 분이죠. 그리고 거기에 이제 선언서 마지막 부분에 단군기원 4252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서른아홉 분이 거기에 서명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독립선언서 중에 발표한 것 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일본을 비난하고 있고, 그리고,

    ▶ 김종배 : 어떻게 비난하고 있는데요?

    ▷ 서해성 : 그러니까 읽으면 대단한 내용들로 들어있습니다. 그러니까 가령 한 대목을 읽어보면 ‘정의는 무적의 칼이니, 이로써 하늘에 거스르는 악마와 나라를 도적질한 적을 한 손으로 무찌르라’, 일본을 악마라고 이렇게,

    ▶ 김종배 : 악마이자 적,

    ▷ 서해성 : 네. 악마이자 적 얘기하고, ‘이로써 5천년 조정의 광휘를 현양할 것이며, 이로써 2천만 백성의 운명을 개척할 것이니 궐기하라, 독립군!’, 이렇게 얘기하고 있고요. 그리고 이제 일본에 대해서 아시아의 적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적이다, 이렇게 선언을 하고 있고, 그러면서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쟁취하자,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뒤에 나온 어떤 독립선언서보다도 가장 강력한 내용을 담고 있고, 그리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당시에 이제 길림성에서 이 문서를 찍었는데, 전체 문장이 국한문으로 되어 있고요. 그리고는 35행 1,723자이고, 석판에다 인쇄를 했습니다.

    ▶ 김종배 : 석판에다가?

    ▷ 서해성 : 돌판에, 네. 그러니까 유성잉크로 했다, 그런 말이죠. 원래 문장대로 하면 이제 문장은 지금 읽으면 좀 알아보기 어려운 그런 문장입니다. '아 대한 동족남매와 기아편구 우방동포아'(我 大韓 同族男妹와 基我遍球 友邦同胞아), 문장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 김종배 : 다 한자다 보니까,

    ▷ 서해성 : 국한문 혼용인데, 지금 우리가 쓰지 않는 한자들이 많이 들어있어 가지고, 그 말을 풀어내면 전혀 다른 말이 되는 거죠, 우리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요. 그러니까 지금 식으로 말하면 ‘우리 대한 동족의 남매와 세계 우방의 동포들이여’, 이런 말인데, 그때는 이렇게 이제 표현을 했던 것이죠.

    ▶ 김종배 : 알겠습니다. 아무튼 이제 세 개의 독립선언 가운데 첫 번째, 가장 앞선 2.1 독립선언이라는 거잖아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 김종배 : 이게 어떤 의미가 있다고 봐야 될까요?

    ▷ 서해성 : 첫 번째는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 독립선언이라는 점입니다.

    ▶ 김종배 : 그렇죠.

    ▷ 서해성 : 그러니까 이것은 2.8 선언과 3.1 선언의 씨앗과도 같은 것이죠.

    ▶ 김종배 : 그렇죠.

    ▷ 서해성 : 그런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차지하고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당시에 해외에 망명하고 있던 저명한 활동가 거의 대부분을 망라하고 있습니다.

    ▶ 김종배 : 아까 서른아홉 명이 서명했다 그랬죠?

    ▷ 서해성 : 네, 서른아홉 명. 김교헌, 신규식, 김동삼, 김약연, 김좌진, 문창범, 우리가 알던 박은식, 신채호, 안정근. 이건 이분은 누구냐면 안중근 의사의 동생입니다. 그 몫으로 들어가 있는 거죠. 안창호,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에 있었던 이대위, 이동녕, 이동휘, 이범윤, 그리고 이시영, 이승만, 이런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분들이 여기 다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리고 세 번째는 이제 여기 이렇게 서명했던 그분들이 노령 대한국민회, 러시아에서 선포했던 우리나라 임시정부죠.

    ▶ 김종배 : 노령이라고 하는 게,

    ▷ 서해성 : 러시아령.

    ▶ 김종배 : 러시아령이 뜻하는 거죠, 네.

    ▷ 서해성 : 네. 그리고 서울에서 선포했던 한성임시정부, 또 상해에서 선포했던 상해임시정부의 주역이 되었단 점입니다, 이분들 거의 대부분이. 그리고 네 번째는 이 서른아홉 분 중에 이탁이라는 분 빼놓고는 변절자가 한 명도 없다는 겁니다.

    ▶ 김종배 : 그래요?

    ▷ 서해성 : 네. 그러니까 굉장한 비율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는 이들이 일제에 대한 이렇게 가장 강력하게 규정했지 않습니까? 그 규정이 만주 일대에서 무장독립운동 하는 그 정서의 기조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무장투쟁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방향 같은 걸 제시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 김종배 : 그러면 이 서른아홉 분 가운데 광복을 맛본 분은 몇 분이나 되시는 거예요?

    ▷ 서해성 : 서른아홉, 우리 기미독립선언에 참여하신 분이 서른세 분이지 않습니까?

    ▶ 김종배 : 우리가 흔히 민족대표 33인, 이렇게 부르니까,

    ▷ 서해성 : 네. 그분 중에 광복을 맞이한 분은 열다섯 분입니다. 그러니까 2분의 1에 가깝게 광복을 맞았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데, 무오독립선언에 서명하신 분들은 기미독립선언에 서명하신 분들보다 평균연령이 5살이 낮습니다.

    ▶ 김종배 : 네. 젊었다는 거죠.

    ▷ 서해성 : 젊었다는 거죠. 그리고 서른아홉 분 중에 광복을 맞이한 분은 열한 분입니다. 그 말은 무슨 얘기입니까?

    ▶ 김종배 : 더 치열하게 저항했고,

    ▷ 서해성 : 그렇습니다.

    ▶ 김종배 : 그 과정에서 순국을 하셨거나 이런 경우도 있다는,

    ▷ 서해성 : 네. 대부분이 순국을 하셨다. 3분의2 이상이 순국을 하셨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말 아쉬운 것은 이름만 남기고 얼굴 사진조차 남아있지 않은 분이 열 분이나 됩니다. 현재까지 우리 정부가 이분들의 사진을 확보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 김종배 : 이런 사료는 발굴을 해야 되는데,

    ▷ 서해성 : 이런 걸 김종배 선생님은 어떻게 하면 좋으시겠어요? 정말 저는 이런 데는 비용을 좀 써도 되지 않은가.

    ▶ 김종배 : 조금이 아니라 그건 무조건 써야 되는 것 아니에요?

    ▷ 서해성 : 그러니까요. 그런데 현재까지도 서른아홉 분 중에 열 분의 사진을 찾지 못 하고 있습니다.

    ▶ 김종배 : 이건 민간에 맡길 게 아니죠. 정부가 나서야 되는 거죠.

    ▷ 서해성 : 정부가 크게 나서서 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하고 있고요. 서명자들의 거의 반 정도가 대종교하고 연관하고 있습니다.

    ▶ 김종배 : 그런가요?

    ▷ 서해성 : 네. 단군교죠, 그러니까 대종교. 그 당시에 이것은 이제 종교성보다는 당시에 한국인들이 무엇을 중심으로 민족의식을 뭉쳤고, 단합했는가 하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 김종배 : 알겠습니다. 2.1 독립선언 짚어봤고, 두 번째 2.8 독립선언,

    ▷ 서해성 : 그렇습니다. 2.8 독립선언은 다른 말로 조선청년독립선언, 이렇게 부릅니다.

    ▶ 김종배 : 그렇죠.

    ▷ 서해성 : 1919년 2월 8일 일본 수도인 도쿄에서 발표했습니다.

    ▶ 김종배 : 이게 이제 춘원 이광수가 기초했다는 그건가요?

    ▷ 서해성 : 네. 맞습니다. 이 선언은 대단한 게 적진 한 가운데서 발표했지 않습니까?

    ▶ 김종배 : 도쿄면,

    ▷ 서해성 : 그렇죠. 그리고 또 도쿄에서도 한 시내에서 발표를 했습니다.

    ▶ 김종배 : 그런데 지금 네오** 님이 문자 주셨는데, ‘2.8 독립선언문 발표 장소가 잘못 알려졌다고 며칠 전에 뉴스에 나오던데요’라는 문자를 주셨네요. 이게 지금 또 그러면서 이 독립기념관에 표기된 도쿄 옛 YMCA 터, 알고 보니 엉뚱한 주소다,

    ▷ 서해성 : 이게 정확하게, 아마 독립기념관은 어떻게 표시되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분 말씀이 상당히 맞는 말씀인데요. 2.8 독립선언을 발표했던 당시 조선기독교청년회관, 정식 명칭이 그렇습니다. 그곳은 현재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도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 김종배 : 완전 허물어지고?

    ▷ 서해성 : 네. 그리고 그 옆에 빌딩이 다 들어섰고, 현재 도쿄에 있는 YMCA 앞에 2.8 독립선언 기념탑이 있습니다. 기념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 도로에다가 우리가 표지판을 세우기가 쉽지 않지 않습니까?

    ▶ 김종배 : 그렇죠.

    ▷ 서해성 : 아마 그래서 그 당시 고민 끝에 현재 있는 그 YMCA 앞에 세우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이런 경우에 비를 세우는 분들이 상당히 곤혹스러울 것 같습니다. 어떻게 세워야 하는 문제가,

    ▶ 김종배 : 그렇긴 하겠네요. 그 건물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고,

    ▷ 서해성 : 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 김종배 : 알겠습니다.

    ▷ 서해성 : 그리고 이제 2.8 독립선언은 우선 2.1 독립선언하고도 직접 연관 속에서 문서를 만들었습니다.

    ▶ 김종배 : 영향을 받았다고 봐야 되는 거죠?

    ▷ 서해성 : 아니. 직접 사람들이 갔습니다. 그리고 3.1 독립선언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의 가교 역할을 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김종배 : 그런데 아무튼 그럼 당시 분위기가 어땠는지 살펴봐야 될 것 같은데요.

    ▷ 서해성 : 무엇보다도 이제 러시아가 붕괴됐지 않습니까?

    ▶ 김종배 : 그렇죠.

    ▷ 서해성 : 제정 러시아가, 러시아가 붕괴되고, 젊은이들이 문화가 앞선 그런 시대가 되었죠. 그리고 이제 이따가도 3.1운동 얘기할 때 말씀드리겠습니다만 그리고 이제 윌슨이 말한 이른바 민족자결주의, 이런 것들이 이제 한국인들에 특히 당시 도쿄 유학생들에게 여러 가지 영향을 줬죠, 어떤 가능성들을.

    ▶ 김종배 : 자극을 줬죠.

    ▷ 서해성 : 그렇죠. 그런데 그렇게 낙관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그때 2.8 독립선언에 서명을 했던 열한 분이 계시는데, 그중에 서춘이라는 분은 이런 연설을 기록을 남겨놓고 있습니다. 만약에 미국의 주의, 여기서 말하는 것은 민족자결주의를 말하는 것이죠. 미국의 주의가 참으로 정의인도, 자유평등 한 것이라면 무슨 이유로 필리핀을 독립시키지 않느냐?

    ▶ 김종배 : 대단한 통찰인데?

    ▷ 서해성 : 그렇죠. 명료하죠. 그러니까 미국이 만약에 정말 민족자결주의를 한다면 왜 식민지를 가지고 있는 필리핀을 독립시키지 않느냐는 거예요.

    ▶ 김종배 : 그러니까요.

    ▷ 서해성 : 네. 그러니까 약간 민족자결주의에 대해서 조금은 의심하면서도 그러나 독립운동을 포기할 수는 없었으니까 이를 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 조선유학생들은 굉장히 활발하게 동경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 잡지 이름이 학지광, 배울 학자에다가 빛 광자인데요. 그러니까 배움의 빛, 그런 뜻이겠죠. 그걸 발행하고 있었고, 웅변이나 토론회나 졸업생 축하회, 신입생 환영회, 이런 것들을 통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있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1919년도를 맞이했던 것입니다.

    ▶ 김종배 : 그런데 아무튼 유학생 중심이었잖아요.

    ▷ 서해성 : 네. 그렇습니다.

    ▶ 김종배 : 그럼 이제 국내의 세력하고 연계가 있었다고 봐야 되는 건가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아까 이제 2.1 독립선언, 대한독립선언을 기초했던 조용은, 그러니까 조소앙 선생을 얘기하는 거죠. 원래 본명이 조용은이고, 호가 소앙입니다.

    ▶ 김종배 : 소앙이 호죠.

    ▷ 서해성 : 네. 소앙 선생이 동경에 갔고, 그리고 장덕수 선생도 갔고, 그리고 그 세 번째로 간 사람이 이광수입니다. 이렇게 가서 이제 유학생들이 독립운동 하도록 유도를 했고, 그래서 이제 거기에 들어가 있는 문장도, 문장에 유사성이 있는데, 그런 문구들을 반영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때 이런 세 사람들이 건너가서 동경 유학생들에게 우리의 김규식 선생이 파리강화회담에 파견되었다, 이런 말도 했고, 그러면서 우리가 독립을 학생들이 일본에 선언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이렇게 말을 했던 거죠.

    ▶ 김종배 : 네. 아무튼 2.8 독립선언이 나오게 된 과정을 좀 더 자세하게 짚어본다면 어떤 과정을 거쳤던 건가요?

    ▷ 서해성 : 그러니까 그 해 1월 초에 동경에서 아까 어떤 청취자분이 말씀하셨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이제 사람들이 모여 가지고 우리가 독립선언을 하자 해서 이제 실행위원들을 먼저 선정을 했습니다. 아주 중요한 분이 이제 최팔용이라는 분인데, 그때 와세다대학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최팔용, 아까 말씀드렸던 서춘, 그리고 나중에 동아일보 사장을 했던 백관수, 이런 분들, 그리고 송계백, 김도연, 이런 분들 10명을 선출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분들이 이제 서명을 하는 거거든요. 그리고는 이제 이런 독립선언서를 만든 다음에 현재 일본에 와있는 여러 나라의 대사관, 공사관, 그리고 일본의 의원들에게 문서들을 보내자, 이런 결의를 하고, 그것이 만장일치로 통과가 되었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 이제 실행위원 10명 중에 1명이었는데, 전영택, 문인이죠. 나중에 문인이 됐던 전영택이 이제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사퇴를 하니까 이광수가 들어갔고, 또 한 명이 추가가 됐는데, 김철수라는 분이 거기 들어갔습니다. 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했던,

    ▶ 김종배 : 맞아. 그 사람이죠?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김철수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이제 들어갔고, 그 당시에는 이제 사회주의나 민족주의나 이런 것들이 분화되어 있거나 그러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총 11명의 실행위원들이 나중에 서명을 하고, 그렇게 되었던 거죠. 그런 과정에서 이제 독립선언기초문을 이광수, 춘원이 쓰기로 그렇게 결정을 해서 그렇게 썼던 것이죠. 그중에서 이제 송계백 선생은 그때 썼던 그 초안 문서 하나를 가지고 서울에 있는 중앙고등학교, 그 당시 중앙중학이죠, 그러니까. 중앙학교에 와서 송진우, 그리고 현상윤, 이런 분들에게 그 문서를 전달을 했고, 서울서도 이런 일을 하는 게 좋겠다라는 의견을 이제 개진하고 전달했던 것이죠.

    ▶ 김종배 : 그런데 도쿄잖아요.

    ▷ 서해성 : 네. 그렇습니다.

    ▶ 김종배 : 쉽게 말하면 적의 심장부잖아요.

    ▷ 서해성 : 그렇죠.

    ▶ 김종배 : 거기서 인쇄가 가능했던 건가요?

    ▷ 서해성 : 네. 어렵게 인쇄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하루 전 날이죠, 그러니까. 2월 7일 날 민족대회 소집청원서라는 것을 이제 일본 동경에 있는 곳에서 했는데, 그 인쇄소 이름이 재미있게도 이토인쇄소입니다.

    ▶ 김종배 : 히로부미?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 이름만 같은 건데, 거기서 1,000부를 인쇄했고요. 독립선언서는 그렇게 인쇄할 수가 없었습니다.

    ▶ 김종배 : 그렇죠.

    ▷ 서해성 : 네. 그래서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빌려온 등사기, 옛날 말을 뭐라 그러셨죠? 주로 일본말 썼지 않습니까, 등사기를? 그렇죠. 가리방이라고 했는데, 그 가리방을 빌려와 가지고 유학생의 하숙방에서,

    ▶ 김종배 : 등사기는 참 오래 갔죠.

    ▷ 서해성 : 네. 하숙방에서 이제 한국말, 그리고 일본말로 된 600부를 등사기로 이제 등사를 했고요. 영문은 이제 등사하기가 좀 어려워서 타자기로 쳐 가지고 각국 관공서에 보낼, 그렇게 해서 인쇄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그 다음 날이죠, 그러니까. 오후 2시에 YMCA회관에서 명목은 조선유학생학우회 결산 총회를 개최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동경에 우리나라 전체 유학생 600명 정도 됐는데, 400여명이 그 현장에 모였습니다.

    ▶ 김종배 : 많이 모였네.

    ▷ 서해성 : 그날은 날씨가 아주 흐렸고요. 그리고 도쿄에서는 아주 드물게 우리가 선언하려고 하는 그 순간 그 무렵에 흰 눈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우리의 선전을 마치 같이 날려주기라도 할 것처럼 눈이 펑펑 날렸습니다. 그래서 이제 학우회 회장이 개회 선언을 하자 이 운동의 중심이었던 최팔용 선생이 ‘회장, 긴급동의요!’하고 단상으로 뛰어올라갔습니다. 그리고는 ‘조선청년독립단을 현재 이 시간부로 발족한다’하자 만장일치의 박수가 터져 나왔고, 그러자 이제 백관수 학생이죠, 그 당시에. 독립선언서를 낭독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김도연이 이른바 기미독립선언문 3개항처럼 여기는 4개항이었는데, 4개항의 결의문을 발표했고, 태극기를 들고 그리고 이제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일본경찰이 나타나서 제지를 하자 의자를 집어던지고, 이렇게 하면서 다투고, 이렇게 하니 30여명이 현장에서 체포가 되었습니다.

    ▶ 김종배 : 그렇게 됐군요. 아무튼 그런데 그러면 이건 어떤 의의가 있다고 봐야 되는 겁니까?

    ▷ 서해성 : 네. 그러니까 우선 이것 말씀드리기 전에 한 가지 말씀드리면 일본 경찰에서 이 사람, 우리 학생들을 내란죄로 기소하려고 그랬습니다.

    ▶ 김종배 : 내란죄요?

    ▷ 서해성 : 네. 그런데 서울에서 3.1운동이 터진 거예요. 그러니까 일본재판부가 이걸 어떻게 해야 되지 하는 굉장한 고민 끝에 결국은 대개 이분들에게 출판법 위반을 적용했기 때문에 그게 징벌형이 이렇게 높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 김종배 : 그렇네요.

    ▷ 서해성 : 네. 그래서 이제 금고형, 대개 한 7개월에서 9개월 정도 받는 그런 정도의 것만 받았다 하는 점도 같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의의를 얘기하자면 우선 무엇보다도 정말 말 그대로 적의 심장부에서 독립선언을 한 일이죠. 두 번째는 이게 아주 중요한 말인데, 한국의 청년학생들의 사회적 책무를 노정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김종배 : 그러면 이제 그 이후에 쭉 이어진 한국 현대사에서 학생운동, 어찌 보면 그러니까 그것의 첫 출발, 출발이라고 표현, 아무튼,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김종배 : 연결이 된다는 거죠.

    ▷ 서해성 : 그렇습니다. 400여명, 600명 중에서 400여명의 학생들이 나서서 비록 400명 숫자가 작은 것 같지만 동경의 유학생 중 거의 대부분이 여기 참석했기 때문에 식민지 청년 대중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고 일깨운 거사였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는 이 독립선언이 3.1운동의 불을 당겼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독립선언이다.

    ▶ 김종배 : 알겠습니다. 자, 그럼 이제 3.1 기미독립선언으로 넘어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 서해성 : 네. 그렇죠.

    ▶ 김종배 : 그러니까 사실은 그나마 학교 교육에서 배운 게 바로 이 부분인데, 당시 일본 상황에 대해서 사실 잘 모른단 말이에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일본은 기본적으로 당시 1차 대전 승전국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세계 강대국 위치에 있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당시 일본의 군사력이 세계 5위 정도 되는 높은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제 일본의 왕 이름이죠, 다이쇼. 그 시기에 이제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합니다, 흔히 그때를. 일본왕 다이쇼 시기에 있었던 어떤 민주적인 여러 가지 문화현상들을 얘기하는 거죠. 그 시기를 대개 이제 신해혁명에서 일본에서 치안유지법이 시행된 것까지를 대개 얘기합니다. 1911년부터 25년까지인데요. 그 치안유지법이 오늘날 우리 국가보안법이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그 시기였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얘기냐면 일본에서 상당히 자유주의적 분위기가 일본에서 있는 그런 상태였다라는 것이고, 노동자들이 당시에 단결권, 파업권 쟁취운동이라든지 여성평등운동 같은 것도 있었고, 그리고 언론 자유에 대한 주장도 있었고, 그런 다양한 것들이 있었던 그 시기를 흔히 이제 다이쇼 데모크라시다라고 2차 대전 이후에 붙은 그런 말이죠.
    그런데 일본이 이제 이렇게 됐던 이유 중에 하나가 가장 큰 게 기본적으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운명이 다 했고요. 독일 제국도 쓰러졌고요. 러시아 제국도 쓰러졌고, 오스만 제국도 쓰러졌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제 중국도 쓰러졌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무슨 얘기냐면 왕정이 끝나가는 그 시기였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신해혁명이 있었고, 러시아혁명이 있었고, 독일혁명이 있었고, 터키혁명이 있었고, 그러니까 군주제가 쓰러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서도 일정하게 조금 자유를 줘 가지고 이 사람들한테 좀 이렇게 달래게 하는 그런 분위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고요.
    또 하나 이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사실은 일본 상황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1917년에 러시아혁명이 발발하자 한국의 조선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당시 수상이었습니다. 데라우치가 1918년에 시베리아 출병을 결정합니다.

    ▶ 김종배 : 그렇죠.

    ▷ 서해성 : 네. 시베리아로 가서 러시아를 침략하는 거죠.

    ▶ 김종배 : 이제 내전, 그러니까 일본군이 그러니까 갔었죠.

    ▷ 서해성 : 그렇습니다. 미군도 가고, 대개 17개 정도 나라가 이제 그 시베리아에 들어갔거든요. 그런데 군인들이 쌀을 이제 많이 쓰게 되지 않습니까?

    ▶ 김종배 : 그렇죠.

    ▷ 서해성 : 그러니까 상인들이 쌀을 매점매석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에서 거대한 쌀 폭동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한국인들도 이때 이 일본인들의 쌀 갈취에 의해서 한국인들도 아사자가 속출했습니다. 그리고 1918년에는 사실은 스페인독감으로 한국에서 몇 천 명이 죽는 그런 상황이었거든요.

    ▶ 김종배 : 그 유명한 스페인독감,

    ▷ 서해성 : 네. 그러니까 이런 상황 속에 3.1운동 시기가 오고 있었다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 김종배 : 그렇군요. 아무튼 그럼 당시 총독은 하세가와?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 유명한 하세가와 요시미치였습니다. 주차조선군사령관이었던 바로 그 사람이죠. 그러니까 이 3.1운동을 무단통치한 바로 그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토지조사사업, 일본의 식민지 수탈체계를 완성했음에도 불구하고 3년 만에 사이토 총독으로 교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총독이 갈리고 이제 사이토가 오면서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흔히 말하는 문화통치, 그리고 사실은 기만적인, 개량적인 이른바 분열술책이죠. 문화통치가 나오면서 한국의 친일파가 대거 등장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문화적인 방법을 한다는 이유로 친일파를 양성하는 시스템으로 가게 되는 거죠.

    ▶ 김종배 : 쉽게 얘기하면 회유책이 들어가니까 넘어간 사람들이 속출하는 거죠.

    ▷ 서해성 : 그렇습니다.

    ▶ 김종배 : 그렇게 되는 거고. 자, 기미독립선언서는 어디서 인쇄를 했어요?

    ▷ 서해성 : 네. 이 얘긴 정말 재미있는 얘기인데요. 사실 1시간 동안 얘기해도 부족할 정도 얘기인데, 짧게 얘기하겠습니다. 2월 27일 밤에 이제 현재 조계사 대웅전 근처입니다. 그 근처에 보성학교 인쇄소인 보성사가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이종일 선생의 책임 하에 인쇄물을 찍어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찍어낼 때에 사람들에게 경찰들이 오면 뭐라고 말하려고 그랬냐면요, 이종일 선생이 성주 이 씨입니다. 성주 이 씨 족보를 만드는 것처럼 위장을 했습니다. 실제로 족보를 찍었습니다. 실제로 찍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와서 성주 이 씨들이 와 가지고 족보를 찍는 그 틈에 독립인쇄서를 같이 찍었습니다.

    ▶ 김종배 : 네. 그래요?

    ▷ 서해성 : 네.

    ▶ 김종배 : 그런데 오류가 있었다는 얘기는 무슨 얘기에요?

    ▷ 서해성 : 네. 그런데 우리 독립운동서 처음 찍은 것은, 2월 27일에 찍은 것은 2차 독립운동서를 말하는 것이고요. 그 이전에 먼저 찍었거든요, 몇 장을 대략이요. 그런데 그 1차 인쇄 조판을, 인쇄하기 전 상태를 조판이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조판을 최남선이 했는데, 그때 이제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그렇게 되어 있어야 되는데, 그게 선조로 그 글자가 바뀌어 가지고 ‘鮮朝(선조)의 獨立國(독립국)임과’, 이렇게 바뀌어서 인쇄가 되었던 것이죠. 현재 독립기념관이나, 그래서 그 1차로 찍어낸 그 문서, 그 문서가 그래서 지금 사실 굉장히 중요한 문서가 되고 있습니다.

    ▶ 김종배 : 그런데 이게 비밀 누설이 안 되고 그 인쇄까지 갔다는 것도 참 눈여겨봐야 되는 대목 아닌가요?

    ▷ 서해성 : 네. 정말 이건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 김종배 : 그러니까요.

    ▷ 서해성 : 수천 명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3월 1일이 되기 전에.

    ▶ 김종배 : 이미? 그런데도 안 새어 나갔던 거예요?

    ▷ 서해성 : 학생조직을 동원해야 되지 않습니까?

    ▶ 김종배 : 그렇죠. 동원을 해야 되니까,

    ▷ 서해성 : 네. 동원해야 되니까, 그러니까 이랬던 겁니다. 서울에 있는 주요 학교 10개 정도 학생들을 모아 가지고 학생대표들에게 교육을 하고, 당시 학생대표들은 자기 학교 가서 학년과 반대표들에게 다 설명을 했습니다. 사실은 비밀이 새어 나갈 가능성이, 안 새어 나가는 게 더 이상한 거였거든요.

    ▶ 김종배 : 그렇죠.

    ▷ 서해성 : 그런데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았습니다.

    ▶ 김종배 : 어떻게 안 새어 나갔을까요?

    ▷ 서해성 : 독립을 바라는 정말 한국인의 염원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 비밀이 정말 새어 나갔을 겁니다. 놀라울 정도로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았어요.

    ▶ 김종배 : 그렇네요. 이건 뭐냐면 하늘이 하라고 허락을 한 거죠. 그렇게밖에 해석이,

    ▷ 서해성 : 그 하늘이란 바로 백성이죠, 국민이고, 그렇습니다.

    ▶ 김종배 : 시간이 벌써 다 됐네. 저번에 한 번 그래서 이제 발표자, 낭독자, 이 얘기도 잠깐,

    ▷ 서해성 : 네. 그보다 더 재미있는 얘기 하나 꼭 말씀드리고 싶은데, 사실 독립선언서를 보성사에서 인쇄해 가지고 지금의 천도교 대교당 쪽으로 가져오는 찰나에 일본 경찰에 걸렸습니다. 걸렸는데, 그래서 위에는 성주 이 씨 족보가 막 쌓여있었거든요.

    ▶ 김종배 : 그러니까 이렇게 위장으로?

    ▷ 서해성 : 네. 그런데 일본 경찰이 그걸 다 걷어낸 거예요. 그리고 이제 마지막을 보려고 하는데, 마침 정전이 됐습니다. 정전이 되어 가지고 일본경찰이 ‘에이, 가라!’, 이렇게 되어 가지고 독립선언서가 발각이 되지 않은 겁니다.

    ▶ 김종배 : 하늘이 도왔다니까,

    ▷ 서해성 : 그러니까 하늘이,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늘이 있긴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정말 대단하고, 우리 운명이, 또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건 독립선언이 인쇄될 때 사실은 종로경찰서에 있었던 한국인 고등계 형사에게 독립선언서를 뺏겼습니다. 신철이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독립선언서를 일본경찰서에 보고하지 않고 신의주로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자살해서 죽었습니다.

    ▶ 김종배 : 그래요?

    ▷ 서해성 : 네. 그러니까 친일파인데, 독립선언서를 하는 그것만큼은 지켜주려고 했던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 김종배 : 마지막 양심은 있었네. 알겠습니다. 이제 마무리를 해 주시죠, 정리를 해야 됩니다.

    ▷ 서해성 : 네. 세 가지 독립선언서 얘기를 해봤습니다. 이게 다큐멘터리로도 나온 적이 없습니다.

    ▶ 김종배 : 그렇네요.

    ▷ 서해성 : 사실은 우리 방송이 아마 세 가지 독립선언을 다 얘기하는 최초의 방송 아닌가 싶은데요. 제가 세 가지 독립선언을 얘기한 이유는 우리 독립선언이 줄기차게 이어져왔다. 난데없이 나온 게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겁니다. 고종께서는 1월 21일 날 아침 6시에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했습니다. 그때 돌아가셨다는 거죠. 그 국장은 우리가 한 게 아니고, 일본 왕실 궁내부에서 주관했고, 우리 고종께서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 것을 그 하늘에 알리는 것을 일본 왕실의 봉고제로 치렀습니다. 그러니까 왜색화 된 국장에 있었다는 뜻이죠. 한국인들은 그 외세에 타살된 봉건, 곧 고종이죠. 고종을 추모하면서 외세에 저항했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주체를 형성하면서 근대국가로 진입했습니다. 한국은 정말, 한국인은 대단한 민족이다, 생각을 갖고 그런 자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 김종배 : 알겠습니다.

    ▷ 서해성 : 그리고 기왕에 이렇게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오늘 짬이 나시거든 세 개 독립운동서를 한 번 찾아보시고 읽어보시는 것도 좋겠다 하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김종배 : 알겠습니다. 이렇게 마무리하고 서해성 작가 보내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서해성 :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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