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서해성의 박학다설] ‘한국 굴뚝의 역사, 고공농성’

김새봄

tbs3@naver.com

2018-01-29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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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성 작가
서해성 작가
  • *내용 인용시 tbs <색다른 시선, 김종배입니다>와의 인터뷰 내용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서해성의 박학다설] ‘한국 굴뚝의 역사, 고공농성’

    ● 방송 : 2017. 1. 26. (금) 18:18~20:00 (FM 95.1)
    ● 진행 : 김종배 시사평론가
    ● 대담 : 서해성 작가

    ▶ 김종배 : 우리 시대의 지식광대 서해성 작가 모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서해성 : 안녕하셨습니까?

    ▶ 김종배 : 한 주 잘 보내셨습니까? 날이 너무 추워가지고요.

    ▷ 서해성 : 네. 날이 춥습니다.

    ▶ 김종배 : 그러게요. 오늘도 아주 두툼한 목도리를 하고 오셨는데,

    ▷ 서해성 : 네. 오늘 근데 정말 추우신 분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 김종배 : 어떤 분들이요?

    ▷ 서해성 : 지금 높은 공장 굴뚝 위에 올라가서 농성하시는 분들 생각하면 우리가 춥다는 것은 참 사치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 김종배 : 그분들 생각하면 우리가 춥다는 이야기를 하면, 하는 것 자체가 뭐한 거죠.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사실 옥탑방에 사는 사람들도 우풍이 너무 세서 견디기 힘드시고,

    ▶ 김종배 : 제 20대 때 옥탑방에 살아가지고 리얼하게 체험을 해서,

    ▷ 서해성 : 반지하도 마찬가지입니다. 습기가 얼고 그러기 때문에,

    ▶ 김종배 : 반지하는 특히 장마철 되면,

    ▷ 서해성 : 겨울도 춥습니다.

    ▶ 김종배 : 춥습니다. 혹시 오늘 주제가 그것 관련된,

    ▷ 서해성 : 네. 오늘 한국 굴뚝의 역사를 얘기해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 김종배 : 네? 굴뚝의 역사요?

    ▷ 서해성 : 네.

    ▶ 김종배 : 웬 굴뚝?

    ▷ 서해성 : 이제 노동자들이나 힘없는 사람들이 자기를 외칠 때 주로 굴뚝에 올라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굴뚝이나 높은 데에 올라가는데 제가 그걸 주로 노동자분들이 올라가시기 때문에 제가 그냥 굴뚝이라고 그렇게 표현해봤습니다. 고공농성,

    ▶ 김종배 : 조금 전에 고공농성 말씀하셔서?

    ▷ 서해성 : 네.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 김종배 : 그러면 역사적으로 한 번 살펴봐야죠. 가장 먼저 높은 곳에 오른 게 언제에요?

    ▷ 서해성 :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기록된 건 1931년 5월입니다.

    ▶ 김종배 : 고공농성의 원조가?

    ▷ 서해성 : 네, 원조가. 남자가 아니고 여성입니다.

    ▶ 김종배 : 일제강점기네요, 1931년이면?

    ▷ 서해성 : 네.

    ▶ 김종배 : 어떤 사연이 있었는데요?

    ▷ 서해성 : 그 평양 대동강가에 유명한 정자 있지 않습니까? 을밀대라고, 고구려 때 을밀이라는 장군이 있어서 그 사람이 길에서 만든 정자인데요.

    ▶ 김종배 : 잠깐만, 을밀이 장군 이름이에요?

    ▷ 서해성 : 네.

    ▶ 김종배 : 그렇구나. 또 새로운 것 하나 알았네. 고구려 때 을밀이라는 장군, 을지문덕은 알아도 을밀 장군도 있었어요?

    ▷ 서해성 : 옛날에는, 성이 이렇게 통일된 것은 근래의 일이고요. 옛날에는 두 글자 성이 많았죠. 그랬는데 그걸 길에서 했던 전설적인 왕인데요. 그 정자 뒤쪽으로 낭떠러지가 한 11, 12m 정도 되는 그리고 그 위로 정자가 있지 않습니까? 정자가 높으면 한 5m 이렇게 되는 것인데 그 당시에 평원고무공장에 다니고 있던 노동자 강주룡이라는 분이,

    ▶ 김종배 : 여성노동자?

    ▷ 서해성 : 네, 여성노동자. 그 위에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당시 언론에서 이 여성노동자를 부르기를 최공녀, 공중에 머물렀다는 겁니다.

    ▶ 김종배 : 그렇게 불렀어요?

    ▷ 서해성 : 네. 9시간 30분 동안 고공농성을, 지금에 비하면 잠깐 한 거죠. 그런데 전국에 있던 모든 언론들이 그걸 보도했고 팔도에 있는 대중들을 정말 울렸죠. 그리고 총독부 권력이지만 그 식민지 권력과 공장의 자본의 권력에 승복을 상당부분 받아냈습니다. 100%는 아니지만,

    ▶ 김종배 : 이기는 싸움이었네요?

    ▷ 서해성 : 상당부분 이겼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임금삭감, 정리해고, 근무시간 연장은 부당하다라는 걸 걸고 싸웠는데 이상하게도 지금도 똑같은 얘기를,

    ▶ 김종배 : 잠깐만, 그러니까 제가 지금 그 말씀드리려고, 노동환경개선을 위해서 지금 고공농성을 한 거잖아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 김종배 : 1931년에,

    ▷ 서해성 : 네. 제가 웃고 있는 게 여러분 죄송합니다만 진짜 웃는 게 아닙니다. 기가 막혀서 하는 쓴 웃음입니다.

    ▶ 김종배 : 진짜 그러네요. 그런데 강주룡이라는 분은 어떤 분이에요?

    ▷ 서해성 : 그 당시 평원고무공장에 다니고 있었고요. 5살 아래의 남편하고 혼인을 했는데 그런데 그 남편이 독립운동 하다가 죽었습니다. 독립운동가 집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분이 공개적으로 일본 몰락하라 말은 하지 않았으나, 그랬다는 기록은 없습니다만 그런 점에서 이 분이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있었지 않았을까? 남편이 또 그렇게 운동을 했기 때문에, 이분도 사실 남편을 찾아서 만주전선을 갖다가 이제 그럴 즈음에 남편이 죽은 겁니다. 그런 점에서 항일의식이 분명하게 있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시 한국의 여성노동자들이 문제가 뭐였냐면요. 우선 남성 노동자가 일본인들의 임금의 2분의 1을 받았습니다. 그건 다 알고 있습니다. 똑같은 일을 하면 2분의 1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식민지가 좋다는 사람도 가끔 있지 않습니까?

    ▶ 김종배 :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아니었군요.

    ▷ 서해성 : 전혀 아니었죠. 같은 공장에서도,

    ▶ 김종배 : 동일노동, 반값임금.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성은 다시 그것의 2분의 1이었습니다.

    ▶ 김종배 : 4분의 1? 그러니까 일본노동자를 기준으로 하면 4분의 1?

    ▷ 서해성 : 네. 4분의 1입니다. 그리고 하루에 15시간씩 일을 했습니다. 끔찍한 노동이었죠. 그런데 회사가 임금을 깎겠다, 이렇게 통보를 한 거죠. 그 말은 무슨 얘기냐면 전체적으로 회사의 임금지출비용을 낮추겠다. 그래서 49명이 단식투쟁을 벌였습니다. 단식투쟁을 벌이는데 그때 이것만 가지고는 안 되겠다하고 강주룡 당시 노동자가 을밀대에 올라가서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올라왔다. 임금삭감을 취소하지 않으면 여기서 내려가지 않고 나를 끌어내리려고 하면 뛰어내리겠다, 이를테면 이런 것을 통해서 압박을 가했고요. 그리고는 그중에서 27명을 채용한다, 그리고 임금삭감은 취소한다. 이를테면 이런 형태로 해서 반 정도 승리를 거뒀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강주룡 열사 혹은 강주룡 노동자에 대표되는 이분은 그 이듬해에 잦은 단식과 그래서 몸이 약해져서 이듬해 평양에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한국노동운동에 최초로 들어 올린 횃불이다.

    ▶ 김종배 : 선구자네요.

    ▷ 서해성 : 선구자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 훌륭하신 분이었고 오늘날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 대부분을 이미 이 분이 제기하고 있었다라는 점에서 우리가 노동자의 운명, 또 현재 오늘 지금 이 순간에도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격려와 동료감 그리고 정부나 혹은 자본에게 있는 참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김종배 : 꼭 기억해야 되는 한 분이군요. 그러면 고공농성 그다음 사례는 언제 있었어요?

    ▷ 서해성 : 그러니까 이제 꼭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데 을밀대 위에 기생들이 춤추거나 혹은 양반들이 가서 시를 짓거나 평양감사가 놀던 그런 곳이었거든요.

    ▶ 김종배 : 또 하나 생각나는 건 다른 게 음식,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런 곳을 바로 유희의 공간을 노동자의 공간으로 바꿨다는 점에서도 강주룡의 행위는 굉장히 문화적으로도 의미가 깊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이분들이 사실 높은 데 올라가는 이유가 있습니다.

    ▶ 김종배 : 왜 올라가는 거예요?

    ▷ 서해성 : 그 말씀 꼭 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높은 곳에 올라가야만 자신을 비로소 알아주기 때문입니다. 위험해야만 사람들이 그 사람의 운명을, 심각한 노동문제에 처해있구나라고 인식하게 된다는 겁니다.

    ▶ 김종배 : 그러네요.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다.

    ▷ 서해성 : 위험하지 않으면 사람들 관심을 안 갖는다는 겁니다. 두 번째는 경찰이나 구사대가 오지 않을 수 있는 공간이 유일한 공간이 거기입니다. 통로가 따로 없기 때문입니다.

    ▶ 김종배 : 강제로 끌려나가지 않을 수 있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목숨을 담보로 대화를 해볼 수 있는 마지막 전선입니다.

    ▶ 김종배 : 그런데 지금 말씀 듣다보니까 북한의 어떤 전술 가지고 우리가 흔히 벼랑끝 전술이라는 말을 많이 쓰잖아요. 사실은 오히려 이게 벼랑끝 투쟁인 거죠.

    ▷ 서해성 : 벼랑으로 일부러 올라간 거죠. 그러니까 이렇게 되는 이유가 사실은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대개 가난한 사람들, 옛날에는 모여 살았거든요. 빈민촌이라고 그러죠, 달동네라고 하고 그랬다가 그분들이 재개발이 되면 쫓겨납니다. 그러면 그분들이 되게 가난한 임금으로 사는 분들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분들이 시 외곽으로 나가다가 시 외곽도 또 재개발됩니다.

    ▶ 김종배 : 계속 밀려나가는 거죠.

    ▷ 서해성 : 그런데 실은 요새는 안 밀려납니다.

    ▶ 김종배 : 왜요?

    ▷ 서해성 : 그럼 빈민촌이 따로 없어야 되지 않습니까? 없습니다, 요새는 빈민촌이. 왜냐하면 그분들이 땅 밑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반지하로 들어가는 거고 아들딸들은 옥탑으로 올라가는 거고 김종배 선생님처럼, 그래서 더 어디 올라갈 수 없을 적에,

    ▶ 김종배 : 수해가 나도 그런 분들이 다 피해를 입는 거죠.

    ▷ 서해성 : 그렇습니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을 때 거기만 해도, 옥탑방만 해도 번지수가 있지 않습니까? 올라갈 수 없을 때 허공으로 오르는 것이거든요.

    ▶ 김종배 : 알겠습니다. 여기서 잠깐 서해성 작가의 말씀을 끊고 저희가 시 한 편을 미리 녹음을 해놓은 게 있습니다. 잠깐 듣고 말씀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해와 달이 아직 없을 때 하늘에서는 밧줄이 내려올 수 있었다
    나는 이제 어디로 올라야 하는가
    해는 저렇게 뜨겁게 이글거리는데
    나는 무엇으로 해가 되고 달이 될 것인가
    얼마만큼 더 올라야 별이 되고 구름이 되는 것인가
    겨울바람이 얼굴 없는 내 얼굴을 베고 지나가는
    지상에서 가장 높은 이 곳
    나는 왜 철탑에 오르는가
    옆으로도 밑으로도 갈 수 없어
    나는 왜 옥상에 오르는가
    내쫓긴 동물조차 오르지 않는 철탑에서
    내 목숨마저 비정규직인 채
    내 인상마저 내 사랑마저 파견근무인 채
    옆으로도 밑으로도 더는 갈 수 없어
    나는 불타는 옥상을 오른다
    나는 오늘도 위태로운 철탑을 오른다“

    지금 시어에 해와 달과 별이 등장을 하지만 결코 낭만적인 시는 아닙니다. 오히려 처절하고 현실의 어떤 처절한 현실, 고통, 이런 것들이 그대로 담겨있는 시인데요. 시인이 누군가요? 서해성 작가께서 직접 지은 시입니다. 시의 제목을 좀 알려주시죠.

    ▷ 서해성 : 철탑을 오르며,

    ▶ 김종배 : 언제 지은 시에요?

    ▷ 서해성 : 철탑에 박근혜 정부 체제하에서 많이들 올랐지 않습니까? 집약적으로 올랐습니다, 박근혜 체제에서요. 왜냐하면 그 당시 노동문제가 너무 심각했고 그랬기 때문에 근래에는 많이 줄었죠, 사실은요. 그럴 즈음에 시를 썼던 것입니다. 그 해와 달이 나오는 이유가 어렸을 적 읽은 동화 중에 오빠하고 누이가 호랑이가 쫓아오자, 호랑이는 거기서 권력을 나타내는 겁니다.

    ▶ 김종배 : 맞아요, 기억나요.

    ▷ 서해성 : 그래서 나무위에 올라갔는데 도끼로 찍고 이렇게 올라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나중에 그 하늘에서 동아줄을 내려줘서 올라가게 되었다, 이런 건데 그때 그런 설화시대가 좋은 시대였죠.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왔기 때문이죠. 지금은 동아줄이 안 내려오죠.

    ▶ 김종배 : 하늘로 올라오는 게 아니라 조금 전에 그랬잖아요. 지하로 내려간다고, 그것도 밀려서, 지금 한 분이 ‘시가 너무 좋으면서도 슬픈 구절이네요. 약자들의 하소연이 뼈아프게 들어있네요’라고 하는 이런 감상의 문자를 보내주시기도 했습니다.

    ▷ 서해성 : 고맙습니다.

    ▶ 김종배 : 고공농성 이야기를 더 해봐야 될 것 같은데요. 이 농성이 부활한 건 언제에요?

    ▷ 서해성 : 지금도 기억하시는 분들 계실 텐데 1990년대 현중노조, 현대중공업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때 노동자들이 이른바 골리앗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기억나시죠?

    ▶ 김종배 : 골리앗, 그럼요.

    ▷ 서해성 : 그래서 그 당시에 비상대책위원장이 이갑용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이걸로 아주 유명해지신 분이죠. 그때 82m 높이의 고공크레인에 올라가서 했었죠. 수많은 기자들이 그 당시 달려갔었죠. 그런데 그럴 때 이걸 올라갈 수는 없었죠. 정말 큰 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 파업에 들어갔을 적에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게 헬리콥터, 해양경비장, 이런 것들이 골리앗크레인에 몰려들고 그리고 그 당시에 헬리콥터로 이걸 중계를 했어요.

    ▶ 김종배 : 저는 지금도 기억이 나는 게 이때 헬리콥터에서 이른바 삐라를 뿌렸어요, 노동자들을 상대로 이제 그만하라고, 저는 지금도 기억납니다.

    ▷ 서해성 : 무슨 대간첩작전 하듯이 했던 것이고 정말 잊혀지지 않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때 거기에 맞설, 맞설 힘은 없지 않습니까, 사실은? 그때 노동자들 50, 60명이 골리앗크레인에 가로로 서서 그때 아침이었거든요. 새벽에 진압에 들어갔는데 기자가 찍은 사진이 지금도 기억이 나는 게 동쪽이지 않습니까? 서쪽에서 찍은 거예요. 그럼 역광으로 나오죠. 그늘진 그들의 얼굴이 일렬로 골리앗크레인에 서있었을 적에 그 장면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우리 노동운동사 혹은 인간의 노동의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명장면이다. 고통스러운 명장면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 김종배 : 이게 벌써 4반세기 전의 얘기네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 김종배 : 벌써 그렇게 되네요. 거의 30년 전의 얘기가 되는 거잖아요.

    ▷ 서해성 : 그런데 이 싸움이 굉장히 중요한 게 이 싸움을 통해서, 싸움은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이걸 통해서 그 당시 연대파업이라는 게 처음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고요. 그걸 통해서 오늘날 민주노총이 출범하게 되는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장기적인 부분에서는 싸움에 성공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 김종배 : 그런데 아마 기억이 가물대시는 분들도 많을 거고 아예 처음 들어보시는 분들도 계실 것 같은데요. 한 번 조금만 복기를 해봤으면 좋겠는데 왜 그들이 고공으로 올랐는지, 여기부터 한 번 얘기를 해보죠.

    ▷ 서해성 : 간단하게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87년도에 789투쟁을 통해서 노동조합이 많이 설립되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현대 측에서 사실은 지금하고 많이 다르게 어용노조를 먼저 설립했습니다. 이게 무슨 얘기냐면요, 과거에는, 지금은 복수노조가 허용이 되지만 당시에는 노조를 하나 설립하면 회사에서 노조 두 개를 설립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측에서, 사용자측에서 먼저 노조를 설립하니까 그 어용노조를 분쇄하는 투쟁에서부터 투쟁이 발전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회사를 믿을 수 없는 거죠, 노동자들은요.

    ▶ 김종배 : 이때 구사대라고 하는 용어도 등장을 했죠.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처음으로 등장한 때이죠.

    ▶ 김종배 : 회사를 구한다 해서 구사대,

    ▷ 서해성 : 그런데 노조를 설립하자 이제 현대에서 제임스 리 테러사건, 식칼테러사건, 이런 것들이 노조를 설립하는 사람들을 제임스 리는 몽둥이로 두들겨 팼던 거고요, 야간에 나타나서요. 수련회 간 사람들을 절에서 수련하고 있었는데 그런 데 가서 때려눕혔던 것이고요.

    ▶ 김종배 : 제임스 리? 교포였어요? 웬 제임스 리,

    ▷ 서해성 : 교포입니다. 미국 교포인데요,

    ▶ 김종배 : 어떤 사람인데요?

    ▷ 서해성 : 이 사람이 바로 노조 탄압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이죠. 전문가죠, 간단하게 말해서요. 이 사람이 한국에 전파시킨 말이 지금도 우리가 쓰고 있습니다. 노워크, 노페이.

    ▶ 김종배 : 이걸 이 사람이 전파했어요?

    ▷ 서해성 : 이 사람이 처음 만든 말입니다. 그 말을 한국말로 옮긴 게 무노동, 무임금입니다.

    ▶ 김종배 : 원조가 이 사람이에요?

    ▷ 서해성 : 이 사람입니다. 저작권자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일들 그 당시 그렇게 했는데 그런 과정을 통해서 노조가 설립되었던 거죠. 그러니까 이분들의 그 당시에 단결하는 마음 같은 강도, 이런 것들이 굉장히 높았다는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 당시에 흔히 진압작전, 12,000여명 정도가 동원되었는데요. 그걸 미포만 작전이라고 합니다. 현대 미포 거기 있었기 때문에 미포만 작전, 아마 검색해보시면 미포만 작전 지금도 찾아보시면 굉장히 많은 장면들이 나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 김종배 : 엄청나지 않았어요, 그때?

    ▷ 서해성 : 혹시 잘 모르시는 분들은 방송 들으시다가 운전할 때 하시면 안 되고 휴대전화 같은 것 찾아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 김종배 : 그러니까요. 그때의 장면을 잠깐만 묘사해 주신다면?

    ▷ 서해성 : 헬리콥터가 위에서 날고 있었고요. 12,000명의 경찰 백골단들이 현대중공업으로 진입하고 있었죠. 바다에서는 경비정들이 보트, 함선이죠. 함선들이 조선소를 향해서 접근하고 있었고요. 그 장면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마치 무슨 이게 영화로 만들어도 사람들 안 믿을 정도의 엄청난 물리적 공세를 퍼부었던 거고요. 그리고 그러자 노동자들이 더 이상 갈 데가 없어서 골리앗크레인 위로 도망가는, 그 장면 한 번 떠올려보십시오. 그런데 거기에 먹을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사람 수십 명이 올라가있는데 라면 부스러기를 서로 나눠먹다가 10여일 만에 내려왔던 그런 사건입니다.

    ▶ 김종배 : 지난주인가요? 작가님께서 건대사건을 전해 주셨는데 그때도 어떻게 보면 경찰이 이른바 토끼몰이 비슷하게 해서 학생들이 건물로 몰려들어가지고, 이번에는 골리앗으로 밀려가고,

    ▷ 서해성 : 사실은 밀고 올라간 거죠. 그런데 재밌었던 게 그 당시는 지금하고 좀 달라서 그때는 노동자가 아니라 학생들도 많이 지원하러 갔습니다. 서울지역에서도 많이 내려가서,

    ▶ 김종배 : 맞아요. 이른바 그때 노학연대라고 해서,

    ▷ 서해성 : 많은 사람들이 지원하러갔는데 그 사람들을 제가 기억하기에 한 700, 800여명, 현장에서 연행했던, 경찰이, 저도 사실 가봤는데 그때 울산에 있는 포장마차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태화강가에 가니까, 웃어서는 안 되는 얘기인데 그런 장면들이 기억이 납니다.

    ▶ 김종배 : 알겠습니다. 아무튼 고공농성 하면 골리앗 투쟁을 빼놓을 수가 없고,

    ▷ 서해성 : 그게 그대로 이어졌던 게 대우 옥포조선소 파업, 그때는 100m 골리앗크레인 위로 올라갔던 일인데 제가 잊혀지지 않는 게 그때 어떤 애기 어머니가 자기 남편이 올라가있는 거죠. 남편이 너무 보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사진기자 망원렌즈로 남편 얼굴을 쳐다보던,

    ▶ 김종배 : 참 애절한 사연이다, 정말.

    ▷ 서해성 : 영화감독도 이런 걸 알면 굉장히 재미있는, 감동적인, 애절한 이런 장면들이 있겠죠. 그리고 사실 또 유명한 농성은 한진중공업,

    ▶ 김종배 : 김진숙,

    ▷ 서해성 : 김주익, 김진숙 하기 전에 있었던 게 김주익이라고 하는 분이 먼저 있었죠. 그 당시에 129일 동안을 그 위에서 버텼습니다.

    ▶ 김종배 : 우리는 쉽게 129일이라고 하는 숫자를 입에 올리지만 올라가 있는 분들한테는 엄청난 고통의 기간이잖아요.

    ▷ 서해성 : 김주익 지회장입니다. 지회장은 키가 1m 90정도 되었고요.

    ▶ 김종배 : 그렇게 컸나요?

    ▷ 서해성 : 네. 그런데 이 양반은 그 85호 골리앗크레인에 누울 수가 없었습니다. 제 말 이해하시죠, 무슨 얘기인지? 자리에 누울 수가 없었다고요, 키가 컸기 때문에. 그런 곳에서 129일을 버텼죠. 그런데 처음에 같이 일하기로 했던 그분들이 한 2,500여명 정도 되었는데 나중에는 크레인 밑에 60명 정도가 남게 되었죠. 회사에서는 이 싸움은 이겼다, 이렇게 봤겠죠. 그 당시에 이제 오늘날 우리가 말하고 있는 파업으로 인해서 끼치는 손해배상을 이 사람들한테 물리던,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 김종배 : 어마어마하게 물리고 가압료 들어가고,

    ▷ 서해성 : 그래서 지회장 했던 말씀 중에 목숨에는 차압딱지를 붙이지 못할 것이다, 그랬습니다. 그러고는 스스로 목숨을 거두어갔던 방송에서 참 말씀을 조심해야 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 뒤로 이제 다시 김진숙,

    ▶ 김종배 : 민주노총 지도위원.

    ▷ 서해성 : 지도위원이 똑같은 크레인에 올라간 겁니다. 똑같은 크레인, 똑같은 방에 올라가서 309일을 견뎠습니다.

    ▶ 김종배 : 아까 골리앗투쟁하면서 노학연대라는 말씀을 해 주셨잖아요. 이때 희망버스였던가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희망버스, 시민들이 연대하러 갔던 거죠.

    ▶ 김종배 : 그렇죠. 시민들이 연대하러 갔었죠.

    ▷ 서해성 : 그런데 지금 그 사람들한테 벌금이 다, 재판을 통해서 벌금을 많이 받았습니다. 희망버스를 타고 와서 김진숙 그 당시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용접공입니다. 김진숙 시도위원이, 그러니까 그것 했다는 것 때문에 집시법 위반, 도로교통법 위반, 이런 것들 적용해서 현재에도 벌금을 다 못 내시거나 이런 분들이 있는 것으로 저는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 김종배 : 저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게 희망버스를 타고 가시던 분들이 연대의 뜻으로 부산 영도구의 한 거리에서 연좌를 하고 농성을 하고,

    ▷ 서해성 : 그게 도로교통법 위반이라는 겁니다.

    ▶ 김종배 : 그 다음날 한 신문은 쓰레기더미였다라고 하는, 그 시민들을 욕하는 그런 기사를 실었던 게 저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이 뜻을 모았던 것인데요. 사실은 김진숙 지도위원은 올라가기 전날 사실은 사생활을 다 정리하고 가지고 있던 카메라도 팔고,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그런 마음으로 올라갔던 것인데 그리고 앞전에 돌아가셨던 바로 김주익 위원장하고도 가까운, 같은 동료였고 그런데 그 동료들이 했던 그 약속들이 지켜지지 않은 것이죠. 그래서 영도에 있는 85호 골리앗크레인에 올라가서 결국 그 당시에 시민사회와 시민들, 또 당시의 노력으로 인해서 살아서 내려올 수 있었던 그런 드문 경우입니다.

    ▶ 김종배 : 아무튼 쓰레기도 사실은 실제로는 별로 없었지만 그런 식으로 쓰레기를 버렸다. 이런 식으로 악담을, 악다구니를 늘어놓는 기사를 내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그것은 승리의 기록으로 남았던, 그런 것 아닙니까?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래도 벌금은 아직 다 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승리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난하고 힘들고 약한 사람들이 싸울 때 여러분 조금 불편하다고 너무 외면하시거나 욕하시거나 그러시는 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김종배 : 그밖에 고공농성 또 어떤 게 있었을까요?

    ▷ 서해성 : 수백 개가 있었는데요. 중요한 것 몇 가지만 제가 불러보겠습니다. 2003년도 상도2동에 철제 망루에서 철거민들이 용역들하고 망루를 만들어가지고 했던,

    ▶ 김종배 : 기억납니다.

    ▷ 서해성 : 있었고요. 그리고 크레인기사들이 또 국회에 가서 당시 국회도서관 어느 부분을 짓고 있었는데, 그런 일이 있었고요. 용산4구역 철거민대책위원들이 올라가서, 한강 빌딩 올라가서 경찰이 강제로 진압했던, 그게 며칠 전에 9주년이 됐지 않습니까? 그다음에도 미포조선에서 또 그런 고공농성이 있었고요. 그때도 한 분이 투신하셔가지고 돌아가시고 그렇게 해서야 비록 협상이 시작되는, 한 분이 투신해서 돌아가시고 난 뒤에야 협상을 하는 그런 일이 있었고요. 농협, 지금 서울 시내에 있는 충정로에 있는 농협에도 민주노총 사무연대 노조분들이 올라가서 싸운 적이 있고 ktx승무원들도 올라가서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정말 우리가 잊혀질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너무 많은데 다 빼고 넘어가면 재능교육이라고 하는 곳에서 혜화동 성당에 올라가서 그때도 아주 날이 추웠습니다. 겨울에 했던 그런 일이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평택에 있는 공장에 김종국 사무국장하고 이창건 정책기획실장이 70m 굴뚝 위에 올라가서 2004년 12월인 것 같습니다. 제 기억하기에 12월 13일부터 100여일 동안 그곳에 했었고 그런 수많은 농성투쟁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지금 얘기하고 싶은 것은 2015년도에 구미에 있는 스타케미칼에 차광호 노동자가 올라가서 408일 만에 내려왔습니다. 엄청난 거죠. 그런데 그렇게 해서 노사가 합의를 이루어졌거든요. 그런데 지금 이 방송하는 데서 머지않은 목동에 현재 열병합발전소에 2명이 올라가 있습니다.

    ▶ 김종배 : 현재, 이 한파에?

    ▷ 서해성 : 한파에 올라가 있는데 지금 역사상 가장 추운 날 중에 하나라는 곳에 올라가 있는데 문제가 뭐냐면 제가 말씀드리는 건 이 2개는 다른 사건이 아닙니다. 무슨 얘기냐면 차광호라고 하는 분이 408일 동안 굴뚝위에 올라가서 쟁취해낸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목동 열병합발전소에 올라가있는 겁니다. 다른 노동자 2명이요.

    ▶ 김종배 : 그때 약속이 어떤 것이었요?

    ▷ 서해성 : 고용에 대한 것이죠.

    ▶ 김종배 : 해고문제였죠?

    ▷ 서해성 : 네. 참 이게 말을 제가 하고 있는데 말이 잘 안 나올 정도로 답답하고,

    ▶ 김종배 : 아니. 그런데 노동자 입장에서는 해고라고 하는 것은 그냥 손가락 빨다가 죽어라, 그 뜻으로밖에는 받아들일 수 없는 거잖아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국인권위원회 사무총장 조영선 그리고 한의사 오춘상, 인도주의 실천의사 홍종원 의사, 이런 분들 가서 건강검진해 주고 그게 며칠 전입니다. 그렇게 한 번 한 적이 있어서 격려가 조금 되는,

    ▶ 김종배 : 정말 건강 진짜 걱정되는데요. 지금 모스크바보다 더 춥다는 것 아니에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이런 상황에 지금 거기 가서 있는 거죠.

    ▶ 김종배 : 그리고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게 용산참사 아니겠어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용산참사가 알다시피 남일당이라고 하는 시계나 보석 같은 파는 옥상에 올라가 있었습니다. 9년 전 1월 20일이었죠. 며칠 전에 추모식도 있고 그랬었는데 철거민들이 거기 있었는데 철거민 5명과 경찰관 1명이 불에 타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되는 게 현재까지도 사실 발화의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고요. 그리고 가장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당시에 누가 봐도, 제가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나오라고 긴급문자가 있어서, 이분들이 돌아가실 때는 현장에 없었고 직후에 현장에 도착을 했었는데 막 급한 전화가 여러 번 와서,

    ▶ 김종배 : 그때 아마 새벽이었죠?

    ▷ 서해성 : 네. 새벽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경찰은 무죄, 철거민만 유죄가 되어서 불에 타서 돌아가신 분들의 가족들까지 다 구속했다는 점입니다.

    ▶ 김종배 : 이것도 제가 기억이 나는 게 일부에서 전철연이라고 이른바 도심 테러리스트들이 여기에 가담을 해서 테러를 하네, 뭐하네, 이런 식으로 보도를 한 적이 저는 지금도 기억이,

    ▷ 서해성 : 더구나 문제는 경찰 무죄 정도가 아니라 그 당시 경찰청장은 진급을 사실상 한 거나 마찬가지죠. 한국공항공사 사장을 거쳤고 현재 자유한국당의 국회의원을 하고 있으니까 진급 중에서도 아주 높은 진급, 진급까지는 아니겠지만,

    ▶ 김종배 : 금뱃지 달았죠.

    ▷ 서해성 : 네. 그렇게 되어 있는, 여기에 대해서 사실 많은 사람들이 뜻있는 사람들은 이 사건 다시 재조사를 해야 된다, 이런 얘기들이 나오고 있는 시점입니다.

    ▶ 김종배 : 그러니까 경찰개혁위원회에서 반드시 인권경찰로 거듭나기 위해서 반드시 재조사를 해야 되는 5가지를 꼽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거잖아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죠. 당시에 국가공권력이라고 하는 게 기본적으로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공권력이 존재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시민의 삶이 불편할 때 그 공권력을 통해서 불편함을 해소시키는 것, 그게 진압이라고 표현하는 거죠. 불편함을 해소시키는 정도여야 하는데 생명을 동시에 5명을 앗아가는, 충분히 예상이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위험한 상태에 불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끌고 갔던, 그런 부분이 있다고 보고 있는 겁니다, 어떤 분들은요. 상당히 타당성이 있는 거고요, 거기에 대해서. 다큐멘터리 영화가 2개나 나왔고 이런 상황인데 이제 여기에 대해서 문재인 정부, 촛불시민정부는 답을 해야 되는, 대답을 해야 되는 그런 상황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 김종배 : 작가께서 오늘 고공농성의 역사를 정리해 주시기 위해서 쭉 정리를 해왔는데 사실은 고공농성의 역사, 지금 원고로 보면 2페이지 빼곡히 적혀있습니다. 사례만, 나열되어 있는 것만, 그런데 지금 방송의 시간상 몇 개만 뽑아서 지금 말씀을 해 주셨는데 이것 말고도 엄청나게 많은 사례가 있다라고 하는 것들을 다시 한 번 확인을 하고요. 이제 마무리를 해야 될 것 같은데 어떤 말씀 마무리해 주시겠습니까?

    ▷ 서해성 : 마무리하기 전에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은 여러분 잊지 마셔야 될 건 밀양송전탑 할머니들이 땅 밑에 들어가 계셨습니다. 못 끌고 가게 하기 위해서, 그런 말씀도 드리는 것이고요. 제주광정도 잊어버리지 않으셔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국가공권력과 개인의 관계 문제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콜텍 노동자들 파업농성이 4010일이 넘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최장의 파업을 현재 하고 있는데 이분들에 대해서도 뭔가 구제할 수 있는 프로그램 같은 것들이 있어야 되는 게 아닌가, 말씀을 드리면서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 순간에도 고공농성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추운 이런 날인데 이럴 때는 비록 그분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할 망정 손을 내밀어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현재 팬택 노동자 2명이 올라가 있는 건 75m입니다. 오늘 체감온도 영하 23도입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있는 굴뚝 공간의 폭이, 현재 굴뚝에 있습니다. 60에서 80cm 정도 폭입니다. 바람만 불어도 날아가 버릴 수 있는 그런 폭이라는 것 말씀을,

    ▶ 김종배 : 바람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없는 거잖아요?

    ▷ 서해성 : 그건 불가능하죠. 그리고 굴뚝 주변은 그분들이 밑으로 내려보낸, 전한 말에 의하면 굴뚝 주변은 다 얼어있다고 합니다.

    ▶ 김종배 : 왜 아니겠어요? 이 추위에,

    ▷ 서해성 : 그래서 바닥이 차가워서 앉을 수도 없다고 합니다. 바닥 자체가 너무 차갑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 어찌 보면 교도소가 천국인 도리어 이런 상황에 있습니다. 우리 신체가 체감온도를 기준으로 하는 게 이마, 턱, 그리고 왼쪽 얼굴 그리고 오른쪽 얼굴에서 체감온도를 오른 쪽 뺨을 기준으로 한다고 합니다.

    ▶ 김종배 : 그래요?

    ▷ 서해성 : 심장이 왼쪽에 있어서 왼쪽 뺨이 조금 더 따뜻한 게 아닌가라고 사람들이 추측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른 쪽 뺨이 2도가 더 낮다고 합니다. 실제로 온도계로 쟀을 적에요. 그런데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거든요. 세상이 살만한 세상이라는 것은 나의 왼손을 뻗어서 상대의 오른쪽 뺨을 만져주는 게 아닌가, 체감온도를 올려줄 수 있는 우리사회의 프로그램 같은 게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같이 이렇게 추운 날에는 옛날에는 밖에 기르던 소도 부엌에 들여놓고 산짐승도 집으로 찾아드는 때이거든요. 이럴 때 우리가 그 높은 굴뚝에서 농성하고 계신 분들, 굴뚝 위에서 농성한다는 것은 이런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굴뚝은 오랫동안 자본주의 생산력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분들이 그 위에 계십니다. 그 생산력의 혜택을 나눠가질 수 있는 그런 여유, 최소한의 인간적인 배려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 김종배 : 따스한 공감과 연대의 눈빛만이 조금이라도 녹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오늘의 박학다설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서해성 작가와 함께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 서해성 :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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