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그때그사건-인터뷰전문] 제주 4·3 피해자 고완순씨

공혜림

abcabc@seoul.go.kr

2018-03-26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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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피해 증언 중인 고완순씨<사진=tbs 공혜림 기자>
제주 4·3 피해 증언 중인 고완순씨<사진=tbs 공혜림 기자>
  • 제주 4·3은 1947년부터 1954년까지 7년여간 공권력의 무력 탄압에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인 3만여명이 숨진 사건입니다.

    제주 4·3 중 하나인 북촌리 학살 사건에서 살아남은 79살 고완순씨는 "제주 4·3이 내 삶을 가져갔다"고 말했습니다.

    군의 총부리에 머리를 얻어맞은 3살 동생은 머리에 물이 차 숨졌고, 미군 통역까지 맡았던 외삼촌은 권력의 무리한 공출을 비판하다 빨갱이로 내몰려 숨졌습니다.

    고완순씨는 당시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힘들다면서 "증언을 많이 해서 죽은 사람 원혼이라도 풀어드려야겠다. 자손들이라도 억울하지 않게 가슴에 품은 한을 풀어줘야겠다"고 말했습니다.

    다음은 고완순씨와의 인터뷰 전문.

    - 기자: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 고완순: 요즘에 외국의 기자, 목사님들 와서 서울에 증언하러 갔다 오고. 증언 많이 해요. 내일(22일)도 광주에서 기자단들. 광주 기자 분이 전국으로 모여서 그렇게 오신다고. 3월에는 5, 6번 증언했어요.
    마을 일이 더 바빠요. 노인회장 일 하면서 마을 일도 최근 한 5개 정도 해놓으니까.

    - 기자: 제주 4·3이 발생한 지 올해 70주기입니다. 그때 기억 떠올리기 힘드시죠.

    = 고완순: 1945년도 해방되기 전에 한 6살, 5살 때부터 우리 앞바다에 포사격 떨어지는 거. 그때부터 반공호에 숨어서 외할아버지 손에 붙잡혀서 숨으러 다녔던 기억이 나고. 그 다음에는 어머니랑 일본에서 있다가 돌아오신 거 기억나고. 제가 어렸을 때, 한 3, 4살쯤 될 때 대마도에서 살았던 것도 기억나고. 그러면서 한 46년도 후반 들어갈 때는 외삼촌이 일본 동경대 사범대 나와서 제주시에 있는 제주중학교에서 수학 선생님 하셔서. 또 저희 어머니는 아버지가 작은 부인 얻어서 제주도 한림이란 곳에서 사니니까 어머니는 부산으로 장사 다닌다고 홧병이 들어서 그랬고. 저는 외갓집에서 6살 더 먹은 언니하고 그렁그렁 살다가 동생이 48년도에 3살이니까, 46년도에 태어난 것 같아요. 제주도에 와서 아버지가 고향이라고 해서 다녀가는 바람에. 4.3 전에 어머니도 제주도 들어와서 언니하고 저하고 어머니하고 외갓집에서 살다가 따로 나와서 살고. 그 전에 어머니가 들어오시기 전에 언니, 외할머니가 외삼촌한테 반찬 같은 거, 농사 지은 거 제주시로. 언니는 저보다 6살 위에니까 짊어지고 가면 저는 어머니 없이 외갓집에서 사니까 언니를 어머니처럼 따라 다녀서. 제주시에 외삼촌네 집에 한 4번 정도 간 것 같아요. 외삼촌이 제주비원이라고 해서. 살던 집이 가까운 곳에 있어서. 신탁통치 막 제주도민들이 신탁통치 팻말 들고 행진하는 것도 기억나고. 그 다음에는 3.1절날 북국민학교에서 3.1운동 기념식 해서. 그때는 누가 죽였는지는 모르는데 사람을 쏘아 가지고 사람이 다쳤다는 소문도 들었고.
    그 다음에는 외삼촌이 북국민학교 마당에서 헬리곱터, 미군 헬리곱터 와서 외삼촌 만나서 한 3일 정도 군인들이 제주도에 있다가 가게 됐는지 우리 외삼촌을 만나서 외삼촌이 통역을 해주니까 미국으로 미국 사람들이 데리고 가려는 걸 우리 외할머니가 코큰 놈들이 우리 아들 잡아 가려고 한다고 다리에 매달렸던 거 기억나고. 그때 당시엔 미국 초콜렛이나 통조림이랑 미군들 전투 양식 그런 거 내려줘서 먹었던 생각이 나면서 사람들이 그러면서 북촌에 와서 우리 마을에서 언니 따라 다니면서. 어느 시기쯤 되니까 젊은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도 열고 분위기가 그런 분위기로 돌아가고 있었고. 그러다가 얼마쯤 있으니까 군인 차도 하루 건너큼씩 군인 차도 왔다가 순경 차도 탄압을 오면. 남자들은 다 숨어버리고 여자들만 있으면 총끝에 칼 꼽아서 문을 열어서 신랑 어디 갔냐, 아들 어디 갔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그러다 보니까 북촌 사람 24명이 붙잡아다가 죽였다는 이야기도 듣고. 그러기 전에 우리 살던 집 앞에서 산 사람들이 내려와서 김순주라는 이장이 그런 사람을 부부간이 와서 난도질 해서 죽였던 거 봤고. 그러고 얼마 안 있으면서 젊은 사람들 숨어 다니고 순경들이 오고 군인들이 막 오고. 아침 되면 막 담벼락에 산에서 내려와서 삐라 붙여놓고, 때려 죽이자 막 그런 글 써서 붙여놓으면 낮에는 군인이나 순경 차가 오면 물 가지고 와서 그거 다 떼라고 집집마다 사람 불러내서 벽에 붙인 거 다 떼었던 거 기억나고.
    그 다음에는 그럭저럭 그런 과정을 얼마 동안 겪고 나니까 아침 일찍 어른들이 웅성웅성 하면서 걱정하고, 난리가 나서. 김녕 쪽에서 함덕으로, 그때는 함덕에는 군인 부대가 주둔해 있었어요. 그 군인들이 김녕에서 함덕으로 가는 사람을 우리 학교 앞에서 군인 2명을 산 사람들이 내려와서 총으로 쏴버렸는데. 현장에 북촌 사람들 8명이 그 시신을 실러 가지고 구르마에 실어서 부대를 가니까 한 사람만, 경찰 가족 한 사람만 살리고 7명을 전부 죽여버렸다 하면서.
    4.3 나던 날 아침이 음력으로 48년 12월 19일날 아침에 어른들이 막 그러면서 웅성웅성 걱정을 하다가 집에 들어와서 밥을 먹었는지 먹고 방안에 추우니까 이불 속에 다리를 파묻고 있는데. 군인이 나오라고 해서 끌려나왔고 나가다 보니까 우리 집이 골목인데 7 주거지가 있었는데 앞에 한 3, 4가옥은 불을 질러 놓으니까 검은 연기가 피어올라가고 있었고. 끌려 나와서 학교 마당으로 갔고. 학교 마당에 가보니까 사람이 꽉 찼어요. 그래서 저는 어렸을 때부터 굉장히 호기심이 많고 똑똑했던 것 같아요. 아이고, 동생은 어머니를 업어서 언니하고 나하고 양쪽 손에 잡고 운동장에 들어서니까. 뒷좌석에 가서 앉으면서 학교 마당을 둘러봤더니 옆에는 지금도 북촌초등학교에 울타리가 있는데 그 울타리 위에 기관총이 2대인지, 3대인지 놓여있는데 기관총 입구는 손주먹만하게 뻥 뚫린 입구가 마당으로 향해 있었고. 앞에는 보니까 남자들이 앞에 끌려나가서 10명, 일고여덟 명이 앞에 나가 서있고 그 뒤로는 사람들이 막 앉아 있고. 트럭에는 보니까 여자 3명에 남자 몇 명인지 확실히 모르겠는데 포승줄에 묶여서 트럭 위에 채워져있고. 뒷좌석에 가서 앉았죠. 키가 작아서 무릎을 세워서 앞에 뭐라 하는지, 군인이 교탁에 올라가서 뭐라 하는데 저는 그게 뭐라 하는지 호기심으로 올려다 보는데. 군인들이 이북 말씨인지, 전라도 말씨인지 쓰면서 제 어깻죽지를 후려쳤어요. 일어서면서 앞의 사람들을 보려고 하니까. 그래서 앉아 있는데. 뭐라 뭐라 말이 끝났는데 총소리가 다다다다 났는데 앞의 사람들한테 바로 마당에서 총을 쐈어요. 앞의 사람들 다 쓰러졌고. 그걸 기관총이 불을 뿜은 것 같아요. 기관총을 쏘아대니까 머리를 땅바닥에 굽어다가 개미처럼 손 잡고 막 기었어요. 기다 보니까 어느 순간에 총소리가 잦아드는 것 같아서 뒤에서 뭐가 탁 받쳐서 손으로 탁 집혔는데 시신이, 여자가 쓰러져 있고 돌아다보니까 발이 보여서 내 손에 피가 묻었고 사람은, 애기는 배 위에 올라앉아서 엄마 가슴에 파고드는 걸 봤고. 그러는 찰나에 제 손에 피가 벌겋게 묻어서 '아이고, 어멍. 나 손에 피 묻었어. 나 무서워' 그렇게 소리 지른 것 같아요. 소리 지르니 3살 먹은 우리 동생도 엄마 등에 업혀서 '엄마야, 빨리 집에 가자' 하면서 군인이 하는 말이 '오늘 죽어도 죽을 거, 내일 죽어도 죽을 거'라면서 남동생 머리를 두 번 후려쳤어요. 동생은 엄마 등에 업혀서 머리를 쳐드니까 높았잖아요. 때리기가 좋았겠지. 머리가 팍 소리가 나면서 그때부터 아이가 울지도 않고 그냥 찍소리를 못해있는 과정.
    그런 시간이 좀 지나고 나니까 큰 참나무, 장대나무 가운데를 줄로 묶어가지고 양쪽 끝에 군인들이 잡아서 제주시에 갈 사람 따라 나와라 해서 사람들이 서로 밟히고 잡아 당기고 넘어뜨리면서 제주 정문 쪽으로 뛰쳐나간 거예요. 현재 북촌초등학교 정문은 동쪽으로 났지만, 그땐 횡렬쪽으로 나있었는데. 그래 쫓아나가서 막 나가다 보니까 38선처럼 이제 장대나무로 줄을 갈랐어요, 절반을. 부모 자식 간에 잡은 손도 놓게 되고. 아이고 어멍아, 아이고 아무개야. 가족한테 가려고 어느 쪽으로든 가려고 하면 막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거예요. 그러다가 동과 서로 갈려서. 저희는 동쪽으로 남게 됐고. 몇십명씩 잘려 나갔어요. 잘려 나가서 이제 조금 있으면 총소리가 다다다다 나고, 먼 쪽에서. 한참 그렇게 몇 번 잘려 나가더니 우리 언니가 하는 말이 '아이고, 어멍, 총으로 쏘는 것 봤소? 우리도 나가면 우리도 나가면 죽을 거라우.' 그때부터 우리는 운동장 입구 쪽으로 갔다가 다시 운동장으로 밀려 들어오는데 다른 사람들도 그런 걸 느낀 것 같아요. 서로 이젠 다들 안으로 밀려오는 거예요.
    그렇게 막 밀려 들어오다가 나중에는 저희 식구들이 잘려나간 거예요. 그러고 간 데가 옴팡밭(옴탕밭)인데 거기가 지금은 변질됐어, 지금 있는 데가. 잘려 나가니까 끌려가 보니까 사람이 4줄인지 5줄인지 행대로 앉아서 죽였는데 넘어진 사람, 엎어진 사람, 사타구니에 머리 박아 있는 사람, 다리 베고 있는 사람, 배 위에 머리가 처박힌 사람. 그냥 시신이 가랑잎처럼 이리 착 저리 착 널부러져 있어요. 그랬는데 딱 보니까 그걸 흙을 쳐다 보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해가 겨울이니까 해가 구름 속에 들어갔다가 해가 반짝 하고 뜨니까. 핏빛이 겨울에 우리 물 떠놓으면 사발에 얼음 얼잖아요, 그런 식으로 땅이 피에 물들어서 까만 흙에 핏빛이 반짝 반짝 빛났어요. 그 뒤에 가서 앉아서 행대로 앉아서 등에서 군인들이 뭐라 뭐라 하더니 전라도 말씨, 이북 말씨 같아, 지금 보니까. 이북 말씨로 뭐라 뭐라 하면서 쇠 놓는 소리, 총을 놓은 것 같아요. 쇠소리가 절거덕 절거덕 소리가 나더니. 죽는다고 하는 생각이 들었는지 손만, 어머니 손만 꼭 붙잡아서 벌벌벌벌 떠는데 함덕 쪽에서 차 소리가 나더니 '사격 중지' 하는 소리가 나갖고. 그러니까 군인들이 뒤에서 '이 간나 새끼들, 파리 새끼보다 목숨이 길다' 하면서 사격중지가 되면서 살아난 거예요. 그러면서 군인 지프차가 와서 사격중지 해서 우리를 쏘지 말라 해서 그 지프차는 학교 마당으로 간 것 같고.
    거기서 또 끌려 나와서 운동장으로 향하는데. 동쪽에서 활활 열기가. 초가지붕 탄 재가 바람에 날리고 학교쯤에 오니까 대장이란 사람이 여러분 집들은 다 타서 잘 데가 없을 것 같으니까 집이 안 탄데나 국민학교에서 하룻밤 자고 내일은 함덕으로 피난을 와라, 그 차들은 가고. 그 트럭에 묶여있는 사람까지 실러서 철수를 했어요. 하고 난 다음에는 남은 사람들은 '아고 어멍아, 아방아.' 울부짖으며 시신 찾는다고 이리저리 가족 찾으러 흩어지고. 우리 외삼촌이 4.3 나기 전에 미군 와서 그렇게 하기 전에 학교에 출근을 했다가 행방불명돼서 죽어서 소식을 몰랐어요. 나중에야 안 사실인데 바닷물에 빠트려서 죽였다고 합디다. 그래서 우리 외삼촌은 빨갱이로 몰렸는데.
    어머니가 '완순아' 동생을 저한테 업혀주면서 아까 친할아버지네 형제들이 다 붙잡힌 것 같은데 애기 업어서 외할머니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외할머니 집에 가봐라. 나는 할아버지네 어떻게 된 건가 찾아가야 겠다' 하고 가고. 나는 우리 동생 업고는 불은 막 타서 뜨거워서 걸음을 못 걷는데 소도 막 누워서 불에 타면서 소리를 막 신음소리를, 돼지는 돼지 움막에서 날뛰고, 오다 보니까 할머니가 총에 맞아서 쭈그리고 앉아서 죽었는데 초가집이 타면서 나무가 머리 위에 비녀 쪽 있는 데로 떨어져서 타고 있었고. 무서워서 뛰다시피하면서 외할머니네 집은 벌써 어지간히 타서 불만 이글이글 타서 주저앉은 상태고, 그래서 애기 업고 집에 가서 어머니를 만나서 친할아버지네 형제 분 돌아가신 거, 가마니하고. 옛날에는 쌀가마니가 볏집으로 엮은 거였어요, 이불하고 가지고 가서 시신 위에 덮어서 흙으로 덮어 놓고. 그러고 와서 그 옛날에는 신철주, 북군 제주시 군수였었는데. 그 부인이 우리 초등학교 동창인데 그 사람네 신철주 장인이 집이 우리 옆에 있었는데. 우리 집도 안 타고 그 집도 안 탔더라고요.
    밤쯤 되니까 젊은 사람들도 나오고. 내일은 함덕에 가면 죽을 거니까. 우리 오늘 하루 먹기라고 잘 먹자 해서. 타서 죽은 소, 돼지 잡고. 쌀밥도 먹기 힘들었는데 제사 지내려면 쌀 꺼내서 놓고 최후의 만찬을 한 거죠. 그럴 때 음식들 준비할 때 얼굴에 마스크 쓰고 가죽 장화 신은 사람들이 한 10명이 산 사람들이 내려와서 마을 실정 알아보려고 내려왔는지 그런 것도 봤고. 저는 밥도 먹었는지 말았는지 잠들어서 이튿날 깨보니까 눈보라가 막 치고 바람이 많이 불고 있는데 저희들은 봇짐을 지고 함덕으로 피난을 갔어요. 피난을 가니까 함덕으로 가는데 거기가 일렬로 쭉 종대로 앉혀서 북촌에 있는 김석도라는 사람이 군인 편에 서서 빨갱이 가족이라고 하면서, 거기서 또 사람을 가려내면서 나머지는 함덕으로 가니까. 지금 같으면 경로당 같은 집에 가서 친척 집들 찾으면서 피난살이가 시작됐고. 거기서 곤란한 사람들은 또 지금 대명리조트 있는 쪽이 모래 산이었는데, 그 산이 바람 불고 하면 구덩이도 파지고 하는데 구덩이 같은 데 가서 2차로 죽였고. 트럭에 실려간 몇 명 중에 여자가 3명인데 거기 우리 이모도 이모부가 산에 갔다고 빨갱이 와이프라 해서 우리 이모도 붙잡혀갔는데 3, 4일 뒤에 어머니가 찾으러 가니까 북부, 돌려내고 죽였어요. 이모 시신 묻어놓고 함덕에서 배고픈 시절을 2달쯤 보내다가 북촌으로 와서 이제 억새풀 그런 거 억새 피기 전에 그런 거 베어서 묶어다 움막 지어서 다리 밑에 거지 사는 것처럼 한 집안에 불탄 집안에 두세집 움막 지으면서 북촌 와서 산 거예요.
    그러면서 4.3은 그렇게 끝났고. 북촌 와서 살면서 성을 쌓아서 산의 사람들이 내려와서 양식을 다 가져가 버리니까 부쳐 먹을, 지게로 막 지어서 마을 안에 성을 깡통을 매달아서 줄로 엮어서 산 사람들이 내려오면 함덕 지사에 알리고. 그 다음에는 연좌제에 걸려서 학교 가도 취직도 못하고 이런 말도 못하고 배울 필요도 없다면서 학교를, 공부도 안한 사람도 있고 그렇게 됐고 했어요.

    - 기자: 그 당시에 궁금한 게 많으셨을 텐데 알 길이 없으셨을 것 같아요.

    = 고완순: 제가 나이 먹어서 이번에 4.3이 뭐고 책을 보고 알았는데. 제가 신탁통치 팻말 들고 제주시에 도착했을 때 김구 선생은 남과 북을 하나로 해서 대통령을 뽑자, 신탁통치 외친 건 이승만은 남한, 김일성은 북한 해서 소련 편이었고 남한은 미국을 등에 업고. 미국이 이승만을 뒤에서 조종해서 하고, 이유가 뭐냐 하면 이북에서 친일하던 사람들이 다 내려왔고. 내려와서 보니까 갑자기 먹을 게 없잖아요. 왜정 시대에 해방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제주도는 더군다나 섬이고 잡곡만 했었잖아요. 그랬고 제주도 행장이 있던 사람이 왜정에 앉혔던 사람들을 그대로 앉혔잖아요. 왜정 때도 공출을 많이 했어요, 농사나 담배 농사 하면. 그런데 해방하고 난 다음도 우리는 잘 살 줄 알고, 나라 찾았으니까, 그렇게 알았는데 그 사람들이 내려와서 공출을 거둬가잖아요. 지식인들은 왜 이런 걸 거둬가느냐 반발한 것 같아요. 그랬고 그 다음에는 반발을 하다 보니까 말 안 듣는다고 자기네가 불 질러놓고 이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서 요새 같으면 가짜뉴스 만들어서 이 사람들이 한 걸로 압력을 넣고 잡아다가 감옥에 넣고. 머리 좋은 사람들은, 저도 그때 레닌 사상이란 걸 알았는데 사회주의 사상이잖아요. 공평하게 빈부 차이 없이 공평하다니까. 우리 왜정 때 너무 배고픔에 시달렸잖아요. 재산이 있어도 다같이 공평하게 먹고 살자니까. 그냥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념적으로 물이 들었다고 하더라도 법이 있는 나라라면 있는 사람 가리고 죄 주고 해야지, 법이 왜 존재하는 겁니까. 무조건 이 마을에 군인 2명 죽였다고 해서 어린 아이든 노인이든 여자든 남자든 판결도 없이 학살시키는 나라가 책임을 져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저는 미국이라는 나라도, 옛날에 무슨 말이 나온 줄 압니까, 기자님. 옛날 할머니들이 미국 놈 믿지 마라, 소련 놈한테 속지 말라, 일본 놈은 일어선다, 이 말은 전쟁을 해서 2차 대전 나서 멸망해도 일본 놈은 일어선다. 우리나라가 힘이 있어서 우리나라대로 독립한 거 아니잖아요. 연합군에 의해서 독립을 하다보니까. 그에 조종받아서 미국, 소련이 간섭해서 이승만 박사 있을 때 제주도 초토화 시켜서 우리나라에서 제주도 하나쯤 없애버려도 된다고까지 했잖아요. 이념적으로 빨갱이 되서 몰아가지고 서북청년단 털으러 갔고 친일했던 행정, 면서기, 경찰 그런 사람들 와서 우리를 다, 좋은 인재들을 다 죽인 것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뭐든지 그 후에도 초등학교를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나와도 제주여중 11회입니다. 졸업을 했으면. 저는 제주여중 시험 볼 때 시험 답안지 대금이 180원이거든요. 그걸 만드려고 보리 심은 밭에 가서 달래 캐다가 북촌에서 제주시, 지금은 아스팔트 길이지만 그때는 자갈길, 거기 지어 날라서 시험 답안지 180원 만들어서 시험 봐서 합격해서 밀가루 포대 물들여서 교복 만들어서 입고 학교 다녔거든요. 저의 꿈을 가지고 간 건 제주 4.3이고. 외삼촌만 살았으면 저는 공부를 더 많이 했으며, 중학교를 졸업했을 거고, 고등학교도 갔을 거고, 사범학교 가면 교편만이라도 잡았으면. 제 트라우마가 뭔지 아십니까. 트라우마가 하도 배가 고파서 속이 조그만 쓰려서 하면 불안증세가 일어나서 막 못견디는 트라우마가 있고. 사람 죽었던 장소 이런 데 못가요, 지금도 무서워서.
    저의 인생도 다 가져가버리고 4.3 가만히 생각하면 외삼촌, 할아버지들 다 죽이고. 우리 아버지는 다행스럽게 한림에 가서 작은 부인 얻어서 사는 바람에 아군 편에 붙어서 청년단장도 하면서 잘 살았지만 계엄령 내려가지고 5일간은 연락이 안 됐거든요.
    우린 죽을 고생 다했고 4.3 겪고 나니까 전염병 와서 어딜 다니지 못하게 경계 다 해버리고. 마마해서, 천연두 그런 병 오고 약은 없고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습니까. 그러다 우리 동생은 맞은 머리가 물이 생기다가 병원도 제대로 못가보고, 음력으로 48년 12월이니까 양력으로는 49년 한 2, 3월달 됐을 거예요. 우리 동생은 머리에 물 차서 8월달에 죽었어요. 7살에 죽었잖아요. 나는 9살. 9살이 지금 80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 다음에 살아 나오면서 제가 여기까지 온 거 그 4.3의 어느 작가님이 와서 자서전 쓰자고 해서 절반쯤 이야기하다가 나중에 놔뒀어요. 할말이 너무 많아서.
    그때는 그런 말 하면 영창 가요. 안기부라는 데가 얼마나 무서운 줄 알아요. 붙잡혀만 가도 오줌을 싼대요. 그렇게 무서웠잖아요. 우리 외삼촌 교편 잡던 삼촌 아들이 하나, 나보다 6살 차이의 아들이 있었는데 공부를 우리는 교육자 집안이고 공부를 잘해서 육사 시험을 봐서 합격했거든요. 연좌자에 걸려서 군인을 못가고. 교편 잡다가 교장으로 해서 암 걸려서 사망한 지 한 7, 8년 됩니다만은. 우리 북촌은예 조천읍이 12개 마을이잖아요. 북촌은 조천읍에는 만세 동산에서 우린 뭘해도 우리마을에 지금 같으면 경로당 같은 데 옛날에는 신성의 집이라고 했거든예. 거기에 태극기가 산머루에 다 숨겨놓고. 산머루에 태극기 문양 다 그리고 우리 북촌에는 독립투사들도 많았고. 조천읍 안에서는 우리 마을이 인재가 많고 똑똑하고. 그때 당시에도 악기들을 연주하고 그런 마을이었거든요. 그래서 우리 마을이 피해가. 너무 똑똑한 사람이 많아서 피해가 많은 것 같아요.

    - 기자: 4.3에 대한 이야기를 언제부터 마음 편히 하실 수 있게 된 거예요.

    = 고완순: 3, 4년 전에 제주시 문예회관에 가서 증언을 한번 했거든요. 그래서 그것이 방송에 나가니까 그 다음부터는 차츰차츰 우리 옴탕밭에 있는 4.3 기념관에도 오고 하는데 금년에는 70주년 그런 것 때문에 작년 겨울서부터 요즘에는 막 알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고. 저도 생각으로는 영했을 것이다. 이번에 4.3에 대한 책을 간추려서 4.3은 제주도 말로 뭔가 하는 조그마한 책이 나왔어요. 제가 어렸을 때 생각만 하고 들었던 부분을 완전히 알게 됐어요. 이렇게 됐구나.
    그전까지는 이런 말을 노골적으로 할 수 있는 장소도 없었고 우리 마을 사람끼리만 4.3 이야기, 배고팠던 거, 먹을 거 없어서 구하러 다녔던 거 경로당에서도 해요. 경로당에 지금 4.3 겪은 사람이 남자 여자 합쳐서 다 이제 세월이 다 가서 돌아가시고 50명도 안 남았어요. 경로당에 있는 어른들은 하고, 하도 못살아서 남편 다 끌려나가 죽고 아들 죽고 하니까. 해녀질 하고 밭에서 일하면서 농사 지으면서 살려고 하니까. 우리 노인당에는 어른들이 하루에 밥먹는 데 30명이 일어서질 못해요. 훈련도 앉아서만 하고. 겨우 유모차에 짚어서 경로당에 나와서 점심을 한 끼 먹고 가고 이럽니다.
    저처럼 똑똑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제가 만약 죽어버리면 잘 없을 거예요. 이제는 어른들도 귀 막아버렸지, 가물가물하지, 치매 와서 요양원에 가버렸지.

    - 기자: 7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때 그 기억을 털어놓으실 수 있게 된 거군요.

    = 고완순: 너무 늦었죠. 이제야 이 진실이 밝혀지는 것 같잖아요. 이거는 국가에서도 학살이지. 이번에 내일 광주 기자들 오시는데, 광주사태 책을 갖다 달라 했어요, 읽으려고. 기자 분이 몇 권 가지고 오신다고 하더라고. 저는 저번에 택시운전사 영화 봤거든요, 참 많이 울었는데.
    하루에 400명 이상 죽임을 당하는 마을 있습니까. 제주도도 마을적으로 종합적으로 따지면 몇명씩 잡아다가 죽이고 제주시 노형동이라는 데가 숫자가 많은데 하루에 많이 죽은 건 우리 마을밖에 없잖아요. 집 다 불지르고, 소 이런 거 다 불지르고.

    - 기자: 이제라도 바라는 게 있으시다면요.

    = 고완순: 저는 가장 바라는 건 물론 어디서 물려받았거든 사상이 잘못됐든 분명하게 그런 책임이 있기 때문에 군중심리로 따라갈 수도 있는 거잖아요. 벌을 주고 싶으면 그 보수들이 주장하는 식으로 정말 그런 데 나서서 국가에 해를 끼친 사람이라면 몇 명만 죗값을 받더라도,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한테는 광주 사태처럼 보상도 해줘야 하고. 또 어렵게 만든 마을 일을 정말 국가가 책임을 져줘야 하고. 그런 걸 바라고 있고.
    저 개인으로 정말 바라는 건 노인당에 있는 사람들이, 다 우리나라가 초고령화 사회로 들어간다 하지 않습니까. 현재도 고령화 사회를 가지고 우리 마을에 노인당에 나온 사람들도 다 독거 노인이예요. 요새는 자식들 낳아놔도 공부하느라고 부모 거들 새가 없잖아요. 혼자 살다보면 작년에 한 해만도 혼자 살다 죽은 친구가 2명이 있어요. 그런거 보면 혼자 사는 노인들이 얼마나 어느 순간에 어떻게 혼자 있다가 죽을지, 아파서, 치매도 막 오지, 우울증도 오지. 이런 사람들이 같이 모여서 협동적으로 살 수 있는 걸 마련해서. 하다못해 뜻 맞는 사람 2명씩이라도 방 한 칸에 살 수 있는 보금자리로 만들어줬으면, 저는 노인회장 입장으로서 그런 걸 소원하고 싶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람들 다 죽인 거, 죄 있는 사람 주더라도 죄 없는 사람 죽인 건 보상을 해서 책임을 져줬으면 좋겠어요. 70년 세월이 오죽 힘들고 오죽 힘들어겠습니까. 이제야 70년 세월 흐른 다음에야 이제야 죽은 사람들만 어쩌구 저쩌구 기자들이 막 찾아오고 이번에도 2월 며칠날 서울 라마다 호텔 가서 전 세계 목사님들 와서 증언하라 합디다. 나는 이 말 할 때마다 너무 억울하고 너무 억울해서 눈물이 자꾸 나오잖아요, 이렇게. 그러니까 저는 증언하기 싫어. 떠벌리고 그동안에 너무 너무 힘들고 배고프고 일하다 보니까 힘들고 늙어버려서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이제 돈 주면 뭐할 겁니까. 저는 만약 돈을 준다 해도 불쌍한 사람들, 아프리카에 줘버리고 싶어요.
    그래도 금년에는 대통령님도 오신다 하니까. 제가 노무현 대통령을 엄청 좋아했어요. 그리고 저는 배우지 못해도 저는 노래도 즐기지 않고 화투도 안 치고 춤도 안 배우고 열심히 살았는데 책은 많이 읽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막 좋아하니까 문재인 운명 책 읽고 노무현 책에 노무현이가 가장 믿는 친구라고 해서 그때부터 좋아했어요. 2010년 11월 8일날 문재인 대통령 되기 전에 북촌 4.3 기념관에 왔습니다. 그래서 집에 미친 여자처럼 가서 운명 들고 막 쫓아갔어요. 가보니까 참배하고 돌아서서 나오는데 '저 운명 읽었습니다, 사인 해주세요' 해서 사인 받았거든요. 그래서 대통령 당선되고 2개월쯤 됐을 때 손편지 석 장 썼어요. 문재인 대통령한테 함덕 우체국 가서 5천원 주고 등기로 보냈거든요. 꿈이 4.3 문재인 대통령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 볼지 못볼지 모르겠는데. 인터뷰 오는 사람도 저 편지 쓴 거 복사해갔어요.

    - 기자: 참 힘든 시간 보내신 뒤 이후에 어떻게 지내셨어요.

    = 고완순: 18살에 엄마 돈 훔쳐서, 제주도는 사람이 살 곳이 못 되는 거 같아서 어마 돈 훔쳐서 우리 언니 시집간 데 속초로 따라갔어요. 우리 형부는 공작선 선장이었어요. 속초에는 부두 파견대라고 있었는데 우리 형부는 강원도 원산에서 이름을 날렸는데 운동선수였었는데. 대한민국에 와서 신유덕이 우리 형부는 중사였었고. 우리 형부는 수출로 공작선 선장이었었고, 언니가 거기 시집 가서 속초 부두 파견 근무할 때 제가 속초로 언니 찾아가서 강원도 속초에서 생활하다가 강릉에 있는 공군 부대에 가서 공군을 만나서, 남편을 만나서 강릉으로 경북예천으로 청주로, 대구로, 부산으로 전속을 다니고 그러다가 86년도에 여기 제주도에 고향에 들어왔어요.
    어머니가 딸만 있어서 혼자 살기 때문에 어머니하고 들어와서 살려고 여기 들어왔고. 우리 남편은 제주도 모슬포 공군 부대 와서 제대했고. 남편 돌아가버리고. 딸 둘이 있는데 큰딸은 사법고시 하다가 지금 소식이 없어요. 사법고시 2차에서 4번 떨어져서 로스쿨이 변경되는 바람에 법무사 하는지 공부만 더하겠다는 거 엄마는 늙어서 힘에 겨워서 아빠 연금으로 엄마가 먹고 살아야 한다 하고 돈 문제로 싸웠어요. 이제까지 연락 없고 10년 되어 갈 거예요. 이제 작은딸이 나를 거둬주고 있어요. 저는 남편 연금, 퇴직금을 연금으로 돌려줘서, 그 연금을 타고 먹고 있고.
    작은딸이 이번에도 80이니까 3월 16일날 경로당에 350만원을 내놔서 북촌 사람들 18000원 뷔페 가서 다 먹였어요. 우리 딸이 16일 그렇게 해줬어요.
    그래서 저는 요즘 같으면 4.3 증언도 하라 그러지 막 인기가 좋잖아요. 세계 각국의 목사님들 와서 외국으로, 일본으로, 아사히 신문 특파원도 왔다가고. 전교조 어디, 막 주문 막하지. 요새가 살맛나는 거 같아.
    지금 우리 마을에서도 인정 받아서 우리 마을이 푹푹 썩었거든요. 4.3 나고 나서 개인주의로 변해서. 10년 정도 입바른 소리 계속 하면서 우린 도덕성을 버리면 안 된다고 해서 마을이 좀 많이 정화됐어요. 젊은 이장님이나 수석 개발 위원장님 등이 저를 인정해줘서 마을에서도 감투를 한 5개 정도 썼어요, 지금. 오늘도 행정으로 볼일 보고 오니까. 요즘 80살에 고완순의 전성기다 그러고 자부심을 가지고 삽니다. 너무 요즘 같으면 살맛이 나고 어떻게 하든지 4.3을 증언을 많이 해서 죽은 사람 원혼이라도 풀어드려야겠다. 자손들이라도 억울하지 않게 가슴에 품은 한을 풀어줘야겠다 앞장서려고. 그렇게 생각했어요.

    - 기자: 아까 제주 4.3이 나의 꿈을 가져갔다 라고 말씀하셨어요.

    = 고완순: 증언할 때마다 한번씩 울면. 울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때 기억이 떠오르면 너무 너무 힘이 들어요. 기자님은 젊으니까 얼마나 좋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까. 아이고, 저희들은 연필이 없어서 몽당연필로 침 발라가면서 하고. 신도 고무신이 터지면 그거 막 신기루, 그때는 사과 궤짝에다가 도구 넣고 마을마다 다니면서 신 기워주는 신기루들이 있었거든요예. 그 사람들이 와서 기워주면 신고 다니고. 어쩌다 운동화 사면 운동화는 겨드랑에 끼고 맨발로 다니고. 아이고, 그 말을 어떻게 다 표현해요. 저 자서전이나 쓰면 다 표현을 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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