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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성의 박학다설] '살아서 21살, 죽어서 31살 박종철'
조주연
tbs3@naver.com
2018-01-14 10:02
지난해 8월15일 3.1운동 100주년 기념 시민토론캠프에서 강연하는 서해성 기념사업 예술감독
*내용 인용시 tbs <색다른 시선, 김종배입니다>와의 인터뷰 내용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방송 : 2017. 1. 12. (금) 18:18~20:00 (FM 95.1)
● 진행 : 김종배 시사평론가
● 대담 : 서해성 작가
[서해성의 박학다설] '살아서 21살, 죽어서 31살 박종철'
▶ 김종배 : 우리시대의 지식광대 서해성 작가 모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서해성 : 안녕하셨습니까?
▶ 김종배 : 한 주 잘 보내셨죠?
▷ 서해성 : 제가 감기에 걸려서 오늘 방송을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김종배 : 비음이 들리네요? 독감이에요, 감기에요?
▷ 서해성 : 그냥 일반 감기입니다. 후두가 약해가지고 감기에 걸리면 후두부터 문제가 생겨서,
▶ 김종배 : 그러니까요. 건강관리 잘 하셔야죠. 그래서 목도리도 따뜻한 것 하셨는데,
▷ 서해성 : 여러분들도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 김종배 :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도 우리 애청자 여러분들이 서해성 작가를 참 일주일동안 기다리셨는데 알찬 얘기 해 주셔야죠. 오늘 주제는요?
▷ 서해성 : 내일모레가 1월 14일입니다. 우리 세대에게 1월 14일은 잊혀지지 않는 날입니다. 바로 박종철 학생, 대학생이었죠. 학생이 남영동 대공분실 치안본부에서 관리하고 있었던 대공수사국의 하나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남영동만 있었던 게 아니라 전국에 수십 개가 있습니다. 현재도 있습니다.
▶ 김종배 : 그게 31년 전인가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정확하게 31년 전입니다. 1987년 1월 14일 날 오전 10시 50분경에 한국의 대학생 한 명이 불법 연행되어서 고문 끝에 사망했던 장소인데 그게 오늘날 우리헌법의 기초가 되는 일이 시작되었다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김종배 : 이게 영화 1987 때문에 재조명되고 있고 또 그러면서 많은 분들이 그때를 다시 회상하는 분들도 계시고 전혀 몰랐다가 그걸 이번에 알게 되는 분들도 계시고,
▷ 서해성 : 상당히 젊은 친구들이 모르는 게 지극히 당연한 거죠. 왜냐하면 벌써 31년 전 일이고 이번 기회를 통해서 역사를 돌이켜보고 틀림없는 건 현재 우리 헌정체제가 87년체제라는 것입니다. 87년도 바로 12월 달에 만들어진 헌법으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고 그리고 그 헌정체제가 가능케 했던 것이 그 박종철 학생의 불행한 죽음, 비극적인 죽음에서부터 촉발되었다고 하는 점입니다.
▶ 김종배 : 6월항쟁이 있기 전에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사건이 있었던 것이죠.
▷ 서해성 : 사실 6월항쟁 때 가장 큰 집회가 6월 10일 날 있었는데 그 집회 이름자체가 고 박종철 학생 추모대회와 민주헌법쟁취를 위한 궐기대회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자체가, 6월항쟁 자체가 박종철에서 시작되었고 최고지에 도달했을 때도 박종철은 비록 자연인으로서 생명은 끝났지만 사회적 생명은 끝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우리 현실 속에서 같이 움직였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박종철은 살아서 만 21살에서 생을 떠났고요. 죽어서 현재 31살을 살고 있는 현재적인 인물이다라는 그런 얘기를 오늘 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 김종배 : 그때 시대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 이것부터 한 번 짚어보죠. 당시의 정세가 어땠는지 이것부터 정리해볼까요?
▷ 서해성 : 네. 저는 영화는 보지 못했습니다만 영화 같은 데는 잘 다루지 않을 수도 있고 해서 이 얘기를 해드리고 싶습니다. 당시 정세는 들으시면 좀 놀라시겠습니다만 경찰의 권세가 굉장히 높았습니다.
▶ 김종배 : 그때는 검찰보다 더 셌죠.
▷ 서해성 : 네.
▶ 김종배 : 치안본부라고 해서,
▷ 서해성 : 경찰이 늘 하는 말이 ‘검찰은 경리까지 합쳐서 3천명이고 우리는 12만명이다’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그 당시에.
▶ 김종배 : 그때 그렇게 주장했어요?
▷ 서해성 : 지금도 제가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고요. 그런데 경찰은 또 전투경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전투경찰이 그냥 여러분 북한하고 전투하는 전투경찰 아닌 거 아시죠?
▶ 김종배 : 전투경찰만 있었나요, 백골단도 있었는데,
▷ 서해성 : 그러니까요. 학생들 시위진압을 하기 위해서, 그리고 정보기관이 곧 동시에 고문하는 기관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안기부, 보안사, 정보사 같은 것들을 가지고 있었고 동사무소에서도 일종의 신고센터를 운영하고 있었고요. 택시기사들에게도 특혜를 준다고 시국사범이나 대통령을 욕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을 태우고 차문을 잠군 채로 그대로 경찰서 앞으로 오면 모범택시기사를 준다고 전 국민을 의심과 감시, 폭정으로 이끌고 있었던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응한 건 여전히도 그 당시에 학생운동이었습니다. 민주노총도 없었고요. 아무것도 없었죠.
▶ 김종배 : 그렇죠. 이른바 제야세력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고 학생운동세력이 있었고,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재야보다는 학생운동이 대중운동으로서는 99%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 김종배 : 그렇죠. 그때 반독재민주화세력의 상황은 어땠습니까?
▷ 서해성 : 그 당시에 학생들이 중심이었고요. 그 학생운동이 난데없이 나온 게 아니고 사실은 다 아시겠지만 3.1운동도 머지않아 100년인데 또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6.10 만세운동, 1929년에 있었던 광주학생운동, 이런 것 전부 다 학생운동이었습니다. 학생이 중심이었다는 겁니다. 20세기 한국사에 학생운동을 빼고 한국사를 설명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던 것인데요.
▶ 김종배 : 그런데 우리 작가님 목소리가 너무 힘들어 보이시는데 괜찮으세요?
▷ 서해성 : 30분 동안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죠. 오늘은 또 더구나 제가 아프다는 말 할 수 있는 그런 날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김종배 : 그러니까요. 잠깐, 물 한 잔 마시고 제가 잠깐만 끼어들어서 한 말씀만 회상하고 넘어갔으면 좋겠는 게 학생운동을 이야기하니까 87년 1월에 고문치사사건이 있었지만 그 몇 달 전에 86년 10월이었나요? 이른바 건대사태라는 게 있었습니다.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애학투련사건입니다. 1288명을 구속을 했는데요.
▶ 김종배 : 저는 그 전원을 일괄구속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정말로 일괄구속을 해버리는,
▷ 서해성 : 거기까지 한 번 제가 간략하게 요점해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학생운동이 중심이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고요. 학생들도 또 거기에 대해서 일종의 그 역할을 다 해야겠다라는 자부심도 동시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두환 정권이 83년 12월 21일 날 학원자율화 조치를 취합니다. 이게 무슨 얘기냐면 그전에 하도 구속만 하다보니까 구속이 아니라 교수들 중심으로 개도하겠다. 이렇게 되니까 공간이 좀 생긴 겁니다. 그 당시 학생회는 전국에 하나도 없었고요. 학도호국단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 김종배 : 경찰이 학내에 상주하고 있었고,
▷ 서해성 : 네. 그런데 84년도에 서울대학교에서 학도호국단장을 투표로 뽑았어요. 그게 백태웅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 김종배 : 백태웅 씨.
▷ 서해성 : 네. 운동할 때 이름은 이정로였는데 가명을 많이 쓰던 시대여서, 그런데 그런 과정이 생기니까 학생들이 뭔가 자율적으로 해보고 싶다. 이런 욕구를 느끼게 되었던 거죠. 그러면서 바로 박종철 열사가 죽게 되는 과정, 이유가 사실은 민추위사건 때문이거든요. 민추위가 뭐냐면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거든요. 그런데 이게 서울대학교에서만 끝난 게 아니라 서울대학교에서 당시 이걸 결성했던 사람은 고양시에서 출마했다가 국회의원 떨어진 적이 있던 문용식이라는 사람이었거든요, 이걸 이끌고 있던 사람이. 그 당시에 이 사람들이 발행했던 기관지 이름이 바로 깃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했는데 이것을 이제 그 당시에 문용식이 주장했던 핵심이론이 간단한 이론인데 학생회를 만든다, 그리고 학생회 산하의 투쟁위원회를 만든다, 그리고 그 아래에 민추위를 둔다, 이렇게 되었던 것이거든요. 그러면서 전국적인 투쟁위원회를 만들게 되는 거죠. 그리고는 첫 번째 했던 일중의 하나가 민정당사를 점검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엄청난 뉴스였죠.
▶ 김종배 : 엄청 큰 사건이었죠.
▷ 서해성 : 그런 과정이었는데 85년이 됩니다. 85년이 되어가지고 김대중 씨가 귀국하면서 2.12 총선에서 야당이 사실상 내용적으로 압승을 거두게 됩니다.
▶ 김종배 : 돌풍을 일으키죠.
▷ 서해성 : 이루 말할 수 없는 부정선거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야당이 사실상 승리하게 되는 겁니다. 전두환 정권이 큰 위기를 느꼈죠. 그런 과정에서 그해 5월 이른바 전국학생연합 아래에 있었던 삼민투위, 삼민이라는 건 뭐냐면 민주, 민족, 민중이라고 하는 삼민, 삼민주의에서 따온 건데요. 삼민투위가 미국문화원을 점거합니다. 그러니까 이건 정말 그 당시에 세계적인 뉴스중의 하나였거든요.
▶ 김종배 : 엄청난 충격이었어요. 미문화원 점거사건은 정말 엄청난 충격이었죠.
▷ 서해성 : 그렇죠. 그리고 점령한 이유가 광주학살을 미국이 배후에서 조절했다는 것에 대한 것이었고 사과를 요구했던 것이었죠. 그렇게 되니까 전두환 정권이 이 배후가 누구냐 하고 추적해보니까 민추위가 나왔다는 거죠. 그 민추위가 나온 과정에서 이제 민추위를 그럼 누가 배후에서 조절했냐? 그러니까 민청련이라는 거예요.
▶ 김종배 : 고 김근태 고문이,
▷ 서해성 : 그렇습니다. 남영동에서 박종철 열사가 고문당했던 방이 509혼데 509호의 끝 지점에 있는 게 김근태 당시 민총위 의장을 고문했던 특실입니다.
▶ 김종배 : 고문했던 사람이 이근안이고,
▷ 서해성 : 이근안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오늘 얘기하게 될 중요한 사람 중의 하나인데 이근안의 스승이자 상사가 바로 박처원이고요. 박종철 열사를 고문하는, 죽게 한 데 총책임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당시 치안본부 처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대공수사단장이고요. 박처원의 스승이 누구냐면 노덕술입니다.
▶ 김종배 : 그 일제 때 저거했던,
▷ 서해성 : 일제 때 고등형사,
▶ 김종배 : 그 노덕술이에요?
▷ 서해성 : 네. 그 노독술이 바로 박처원을 픽업했고 일제 고문기술을 박처원에게 전승했고요. 박처원이 다시 자기 제자이자 후배, 학교는 아니니까 제자는 아니겠습니다만 제가 여기서 말하는 제자라는 것은 고문기술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근안이 가지고 있던 고문기술이라는 게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던 바로 노덕술에게 했던 그것이 바로 노덕술을 직접 만나지는 않았지만 한 단계 거쳐서 전승된 것이라는 겁니다.
▶ 김종배 : 고문기술에도 계보라는 표현을 써야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계보라고 표현한다면 그게 일제 때 우리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했던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군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걸 이어져서 박처원을 통해서 이근안까지 이어지게 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민추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문용식 학생, 그리고 김근태 당시 의장에게 고문을 가했던 거죠. 김근태 당시 민정운동가는 1985년 9월 달 안에만 23일간 고문을 받았습니다.
▶ 김종배 : 하루 버티기가 힘들다는 게 고문인데,
▷ 서해성 : 23일간 받았습니다. 상상을 초월할 수 없는 고문을 받았던 것이고요. 그중에 김근태 의장이, 다시 민청련 의장입니다. 민주화청년연합이라는 뜻입니다, 민청련이요. 그때 했던 것이 9월 13일 날이었습니다. 그날이 금요일이었습니다. 이근안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가 죽었던 최후의 만찬이다’, 13일의 금요일 얘기하는 겁니다. 잘못된 얘기긴 합니다만 하여튼 네 장례식이다, 최후의 만찬이다 하면서 관절뽑기, 전기고문 등등을 했던 것이죠. 정말 저주에 찬 날이었겠죠, 1985년 9월 13일.
▶ 김종배 : 그런 인간이 또 한때는 목사자격증 얻어가지고 목사활동을 했다는 것 아닙니까? 나중에 자격이 박탈되기는 했습니다만,
▷ 서해성 : 그렇습니다.
▶ 김종배 : 자격이 박탈됐던 이유가 고문은 예술이라고 주장을 해가지고,
▷ 서해성 : 그 말을 한지 며칠 뒤에 김근태 고문께서 의식불명에 빠지셨고 나중에 돌아가셨습니다.
▶ 김종배 : 정말로 이건 세상을 희롱하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어떻게 저런 망발을 해댈 수 있을까라고 하는 생각이 그때 참 많이 들었는데,
▷ 서해성 : 그렇습니다. 바로 그렇게 이어졌던 것인데 86년도에 봄에 박종철 학생이 서울대학교 어느 학과의 학생회장으로 선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박종철 학생이 왜 여기에 끌려갔느냐 하는 말씀을 드려야 되는데 바로 박종철이 자기 누나가 목도리를 떠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목도리를 자기가 좋아하는 선배에게 둘러줬어요. 그 사람이 박종훈이라는 사람입니다. 그 목도리는 현재 남영동 대공분실 그 자리에 가면 박종철기념관에 현재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어떤 선배를 좋아했던 거죠. 그 사람이 박종훈이라는 사람입니다. 나중에 한나라당에 지역구 출마하거나 그런 적이 있었는데 그 박종훈이라는 사람에게 그걸 줬는데 그 사람이 바로 민추위 사람이었던 겁니다.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 그런데 거의 모든 사람이 잡혔는데 박종훈이 안 잡힌 거예요.
▶ 김종배 : 그래서 선배 거처 대라, 그러면서 고문했던 것 아닙니까?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래서 1987년 1월 13일 날, 박종철은 1월 12일 날은 부산에 있었습니다. 집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1월 13일 날 서울에 와가지고 학교에서 6시간동안 일본어강의를 들었습니다. 방학 동안에 한 특강을, 그리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자정 직후에 친구들과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경찰관이 불렀습니다, 형사들이. 그리고는 데리고 갔던 거죠. 그리고는 차로 그날 바로 남양동으로 가지 않았고요. 차로 몇 시간 동안 시내를 돌린 다음에 새벽 무렵에 남영동에 도착했습니다.
▶ 김종배 : 차로 일부러 돌았어요?
▷ 서해성 : 원래 그렇습니다. 바로 데려오지 않았습니다. 바로 데려오면 눈은 가렸지만 어디쯤인지 대략 짐작하게 되기 때문에 일부러 그렇지 않고 거기 데려왔던 겁니다.
▶ 김종배 : 오히려 공포라고 하는 게 도대체 앞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를 모를 때 무지 내지 부지에서 공포가 극대화된다고 하는데 바로 그걸 노리고 계속 돌았던 거군요.
▷ 서해성 : 그래서 새벽녘에 도착해서 고문을 시작했던 것이고요. 여기서 대개 언급하지 않는 중요한 기록이 있어서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1월 13일 날 김종호 내무부장관이 남영동 대공분실을 방문했습니다.
▶ 김종배 : 내무장관이?
▷ 서해성 : 내무장관이요. 나중에 자민련 의원을 했죠, 이 양반이. 그래서 간부들을 모아놓고 전두환 대통령 각하의 임기가 1년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니까 87년 3월 안에 학생운동을 일망타진해라, 이를테면 이런 식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면 이제 대통령선거 비슷한 것들이 있고 그러는데 소란이 일어날 그런 일들을 미연에 차단해라, 이렇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형사들이 갑자기 관망하고 있던 학생들을 일제히 잡아들이기 시작한 겁니다. 그 과정에서 박종철을, 바로 그날이지 않습니까? 바로 그날 체포된 거예요. 경찰들이 보고 있다가 박종훈을 언젠가는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장관이 직접 지시하니까 나와 가지고 잡아들이게 된 것이,
▶ 김종배 : 그때 시대분위기라는 게 예비 검속이라는 표현을 써도 되는지는 모르겠는데 멀쩡히 집에서 자고 있다가 끌려가는 경우가 되게 많았어요. ‘니네 앞으로 뭐 할 예정이라며? 하면 안 되니까 니네 며칠 간 경찰서에 가서 자야겠다’ 하면서 끌고 가는, 이런 것 비슷한 거잖아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이건 그 정도고 아니고 불법일 뿐만 아니라 데려오자마자 바로 고문을 시작했던 거죠. 그래서 옷을 다 벗겼고요. 그리고는 수건으로 손과 발을 묶었습니다. 그리고는 양쪽에서 두 사람의 고문경찰관이 양쪽 팔을 붙잡고요. 한 사람은 머리를 눌렀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은 계속해서 그걸 시켰고요. 그런 과정에서 박종철 학생이 욕조에서 목이 눌려가지고 거기서 기도압박으로 질식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 김종배 : 잠깐만요. 우리 작가님 너무 힘들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잠깐 따뜻한 물 드시면서 1분이라도 쉬시고요. 계속 문자가 들어오고 있는데 몇 개의 문자만 소개해드리겠습니다. 4723님이 박종철의 죽음은 봄이 되어서야 저는 알게 되었어요. 저 고3 때라고 하십니다. 그러다가 이한일 열사가 쓰러졌고 저는 중고등학생 때 81번 버스, 81-1번 버스를 타고 늘 남영동에 갔었어요라는 문자를 보내주셨고요.
▷ 서해성 : 저게 남영동 가던 버스였습니다.
▶ 김종배 : 그렇군요. 그다음에 tbs 앱으로 jgm36173님이 또 문자 주셨는데 지인이 건대사태 때 잡혀서 빨간 줄이 올라가서 당시 기업 취업이 안됐던 일이 있었습니다. 저도 기억나는 게 최종면접 통과해도 마지막으로 신원조화라는 걸 민간기업이 했었어요. 경찰에 해가지고 시위전력 있으면 떨어뜨려버리고,
▷ 서해성 : 그런데 이 말씀하니까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건대사태가 진행 중일 때 금강산댐 사건이 납니다. 이게 중요한 말입니다. 무슨 얘기냐면 학생들이 건국대학교로 몰려들었습니다. 연합집회였죠, 그 당시에. 그런데 그 당시 정부에서 건대사태가 일어난 그다음 날 북한이 금강산댐을 만들었는데 63빌딩이 반까지 잠기는 수몰공격, 홍수공격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 김종배 : 그때 티비에서 엄청 틀었어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바로 그게 건대사태 때 나온 것입니다. 그걸 보여준 다음날 1288명을 구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그 당시 전두환 정권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정치세력이 아니었습니다.
▶ 김종배 : 그렇죠. 금강산, 이른바 수공이라고 표현했잖아요. 북괴가 수공을 하는데 정신없고 철부지인 대학생들은 지금 저런 빨갱이 비슷한 시위하고 있다. 이미지 조작으로 가는 거잖아요. 상징조작으로,
▷ 서해성 : 전혀 사실이 아니었고 거짓말이었죠.
▶ 김종배 : 아무튼 이 박종철 열사의 그 마지막 순간을 말씀해 주시다가 제가 목소리가 너무 안 좋으신 것 같아서 잠깐 끊었는데 계속 이어주시죠.
▷ 서해성 : 그리고 이제 다 알다시피 박처원이 나서서 경찰관, 그 당시 고문했던 사람 중에서는 간부 두 명을 고문한 걸로 그렇게 해서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 김종배 : 저는 어떻게 그게 나올 수 있는지 정말 지금도 기가 막혀요.
▷ 서해성 : 죽은 당일, 그다음 날 바로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그렇게 브리핑을 했습니다.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요. 그리고는 경찰에서는 당시 퇴근을 안 하고 있었던 공안검사가 한 사람이 있었는데 최환이라고 하는 공안부장이 있었는데 그 사람에게 서류를 들고 간 거죠. A4 두 장으로 되어 있는 서류를 들고 가서 지금 별로 중요하지 않은 어떤 인물이 하나가 이렇게 해서 죽게 됐는데 그 사람의 시신을 부모도 동의했으니 오늘 밤 안으로 화장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치안검사가 그럴 수 없다, 내일 아침에 변사사건으로 처리하겠다. 이렇게 되었던 것이죠. 그런 과정 속에서 고문조작문제가 터졌던 것이고요. 요점을 아주 간략하게 말씀드리자면 그런데 이제 중앙일보에서 한 기자가 그걸 짧은 이단으로 보도를 했고요.
▶ 김종배 : 아주 사회면 구석에 짧게 단신으로 보도를 했었고,
▷ 서해성 : 그러나 그 기사가 아주 중요했던 것이고요. 그 뒤에 당시에 동아일보 기자가 또 보도를 했고,
▶ 김종배 : 그걸 크게 키운 게 동아일보고, 그때 제 기억이 맞다면 그때 아마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김중배 국장이셨던 걸로 나중에 한겨레신문 사장까지 하셨던, mbc 사장도 하셨죠.
▷ 서해성 : 진정한 언론인이죠. 그때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이여’라고 하는 유명한 칼럼을 쓰셨죠. 그런 과정들을 통해서 국민들이 누구나 다 알게 되었던 것이고 그런데 그런 과정에서 그게 조작되었다는 것을 알린 사람은 당시 민통련 사무처장이었던 이부영이라고 하는 분입니다. 나중에 정치하셨던 그런 분이시죠. 그분이 간수 세 명의 도움을 받아서, 그런 능력이 좋으신 분이에요, 그분이요. 그것을 당시 밖에 있었던 천주교 쪽을 통해서 민주화운동을 하고 있었던 김정남 선생에게 그걸 전달을 했습니다. 김정남 선생이 그런데 당시 수배 중이었기 때문에 그걸 바로 전달할 수 없어서 고용부 변호사를 통해서 당시 함세웅 신부님께 전달을 했고 함세웅 신부님께서 다시 그걸 당시 홍제동성당의 주임신부를 하고 계셨던 김승훈 신부에게 이걸 전달을 했습니다.
▶ 김종배 : 저희가 지난 성탄절에 함세웅 신부님 모시고 잠깐 이야기 나눴는데 바로 그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김승훈 신부님 찾아가서 ‘신부님, 이번에는 신부님이 교도소에 들어가셔야 됩니다’ 했더니 ‘알았다, 가겠다’라고까지 답변하셨다고,
▷ 서해성 : 함 신부님이 아마 나중에 저승에서 그분들 만나시면 많이 혼날 겁니다.
▶ 김종배 : 왜요?
▷ 서해성 : 왜냐하면 감옥 들어갈 순번을 늘 정해 주셨거든.
▶ 김종배 : 지금이니까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그때는 엄청나게 비장한 각오로,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총살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했죠. 사실은 김수환 추기경님도 뺄 수 없는데요. 김 추기경님이 다 알고 계셨고 그 전에 2월 7일 날 명동성당 미사강연할 적에도 카인과 아벨 비유를 하면서,
▶ 김종배 : 바로 그 말씀하시더라고요. 함세웅 신부님이 당신께서 지금까지 들었던 김수환 추기경님의 각론 중에서 가장 셌던 각론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그렇게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 서해성 : 그렇게 하셨고 그 당시 명동성당에 계신 분들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고요. 마침 그날이 그런데 광주학살을 한 5.18 추념미사였거든요. 그때 김승훈 신부님께서 박종철 학생 고문치사사건은 조작되었다는 걸 폭로했고 이름까지 공개했습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전두환 정권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 이르렀던 것이고요. 결국 그래서 이제 5명의 경찰관을 구속하는 상태로 갔던 것이죠.
▶ 김종배 : 그러니까 사실은 이게 워낙 압축적으로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했지만 1월에 그 비극이 있었고 또 사실은 많이 안 알려져 있지만 2월 7일하고 3월 3일에 서울에서 대규모학생시위가 있었습니다. 그때 파고다공원 맞은편, 이런 쪽에서, 그러니까 6월항쟁에 비해서는 물론 규모가 작았만 그때 당시로서는 대단히 큰 학생시위였었고 그것이 이제 사실상 호헌조치로 연결이 되고 6월항쟁까지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 서해성 : 그렇습니다.
▶ 김종배 : 6월 10일이라고 하는 게 제가 지금도 기억나는 게 민정당 대선후보 선출일이었어요.
▷ 서해성 : 노태우가 그때 대선후보로 선출되었습니다.
▶ 김종배 : 노태우 씨가 그때 대선으로 선출된 그날이 6월 10일이었고 그래서 바로 그날 이른바 총궐기라고 해서 6월항쟁이 시작되었던 게 바로 그 계기였죠.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때 바로 6월 9일 날 연세대학교 앞에 큰길을 백양로라고 흔히 부르는데 백양로에서 출정식을, 연세대학교가 6.10항쟁에 나서기 위해서 출정식하는 과정 속에서 대개 내일이, 그 당시에는 하루 전날 모여서 왜냐하면 하루 전날 모여야 그다음 날 집회가 가능하기 때문이죠. 출정식을 거행하고 거리진출을 시도하던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러다가 전경들이 너무 세게 나오니까 학생들이 뒤로 물러섰습니다. 물러서는 과정 속에서 이한열 학생이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 그 발사기 이름을 아실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YS44라고 불렀습니다. 직격 최루탄 발사기를 원래는 그건 각도가 수직으로 쏘면, 수평으로 쏘면 발사가 안 되도록 되어 있는데 그걸 일부러 바꿔가지고, 고쳐가지고 수평으로 발사했고 그게 머리를 강타하면서 현장에서 사망하진 않았고요. 7월 5일 날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그리고 7월 9일 날 이한열 학생 장례식이 있는데 그게 이른바 100만 명이 모였다. 이렇게 얘기하는 연세대학교 백양로에서부터 시청 앞 광장에서 을지로로 이어지는 그 거리에 가득 찼던 사람들을 지금도 생각납니다.
▶ 김종배 : 지금과는 다른 풍경이 시청 앞 분수대를 둘러싸고 100만 명이 모였던 그 사진은 지금도 아마 길이 역사에 남을 그런 사진,
▷ 서해성 : 역사에 영원히 남을, 그런데 그중에 어떤 한 분이 시청 위에 올라가서 태극기를 조기로 바꿨지 않습니까?
▶ 김종배 : 그런데 벌써 시간이 다 흘러가는 것 같은데 남은 가족분들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저는 지금도 기억나는 게 아버님이었죠. ‘종철아 잘 가그래이’,
▷ 서해성 : ‘철아 잘 가그래이, 아비는 할 말이 없대이’
▶ 김종배 : 그렇죠. 그 한 말씀이 참 지금도,
▷ 서해성 : 시간이 다 되어서 그런데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게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때 그걸 담당했던 검사들도 국가권력에, 당시 독재세력에 일정하게 부역한 걸로 사실은 그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치안검사를 빼놓고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이름을 거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창헌이라고 하는 당시 팀장, 검찰팀장은 94년도에 헌법재판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안상수라고 하는 당시 담당검사, 그 당시 당직검사였습니다. 당직검사는 알다시피 당시 여당에서 집권대표도 했었고 그리고 지금 창원시장을 하고 있습니다. 막내검사, 수사검사였던 박상옥 검사는 현재 2015년도에 대법관으로 임명 제청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검찰총장 서동곤은 거기서 책임을 진 게 아니라 안기부장이 되었고 나중에는 청와대특보를 했습니다. 부실수사를 했던 사람들이 모두 출세했고 막내검사까지 대법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우리 역사가 이렇게 박종철 학생이나 이한열 학생이 이렇게 비극적으로 돌아가셨는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전진하지 못하고 힘들게 전진하고 있는 이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 김종배 : 결국은 단죄를 못한 거죠. 한마디로 정리를 하면 6월항쟁을 거쳤고 6월 민주화 성취까지 이뤄냈음에도 불구하고 관계자들 단죄를 못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거죠.
▷ 서해성 : 제가 가장 잊혀지지 않는 장면은 2월 7일 날 어머니, 정차순 어머니입니다. 그리고 누님은 박원숙이라고 하는 누님인데 그 두 양반이 어렵게 서울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경찰이 서울역에 도착했다는 걸 알고 다시 데리고 부산으로 내려갔습니다. 내려갔는데 끌려간 거죠. 그런데 부산 어느 절로 다시 도망갔어요. 거기서 ‘철아 깨어나라’ 그러면서 21번의 종을 쳤는데 그 장면이 제 인생에서 봤던 장면 중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고통스러웠던 순간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때 21번의 종을 쳤는데 종을 친 이유는 박종철 학생의 나이를 만으로 세서 21살의 종을 쳤던 것이고 당시 성당과 그리고 알만한 성당과 교회들에서도 21번의 종을 쳐가지고 박종철 학생을 추모했던 그런 일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 김종배 : 마지막으로 이 질문을 드려야 될 것 같아요. 그러면 이 일이 87년 한 해에 다 벌어졌던 일 아닙니까? 87년을 우리는 어떻게 정리를 해야 되는 겁니까?
▷ 서해성 : 87년은 우리 헌법이 탄생한 해입니다. 우리 헌법은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욕조에 반쯤 젖은 채로 태어났습니다. 여러분들 헌법을 생각하실 때 언젠가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우리헌법이 피눈물로 태어난 헌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기억해 주실 것은 박종철은 21년을 살았고요. 죽어서 31살을 살았습니다. 이한열 학생은 살아서 20살을 살았고요. 죽어서 31살을 살고 있습니다. 그 청년들의 삶도 같이 기억해 주십사 하는 부탁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 김종배 : 개인적으로 남영동을 가본 적이 있는데 가보니까 정말로 만감이 교차하던데 바로 이 역사의 현장을 시민에게 돌려줘야 된다는 목소리가 함께 나오고 있다는 점도 우리는 잊지 말아야 될 것 같습니다.
▷ 서해성 : 꼭 시민에게 돌려줬으면 좋겠습니다.
▶ 김종배 : 혹시 시간되시면 가서 보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 서해성 : 죄송합니다만 내일 일요일 날 오후 2시에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행사가 있습니다. 추모행사가, 괜찮으시면 여러분 참석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김종배 : 알겠습니다. 감기가 걸려서 코가 막힌 상태인데 너무나 힘들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애청자 여러분들을 위해서 아주 귀한 말씀을 해 주신 서해성 작가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요. 빨리 약 드시고 쉬셔야 될 것 같아요.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 서해성 :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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