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서해성의 박학다설] 춘궁기에 대한 보고서

지혜롬

tbs3@naver.com

2018-03-26 21:19

프린트
서해성 작가
서해성 작가
  • 내용 인용시 tbs <색다른 시선, 김종배입니다>와의 인터뷰 내용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방송 : 2018. 3. 23. (금) 18:18~20:00 (FM 95.1)
    ● 진행 : 김종배 시사평론가
    ● 대담 : 서해성 작가

    [서해성의 박학다설] 춘궁기에 대한 보고서

    ▶ 김종배 : 우리 애청자 여러분들이 기다리셨던 코너죠. ‘서해성의 박학다설’ 시간,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우리시대의 지식광대 서해성 작가 모셨습니다. 어서 오세요.

    ▷ 서해성 : 안녕하셨습니까?

    ▶ 김종배 : 그런데 오늘 얼굴이 약간 붉은, 어디 몸이 안 좋으세요?

    ▷ 서해성 : 괜찮습니다. 일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 김종배 : 피곤해 보이셔가지고, 알겠습니다. 오늘 어떤 이야기 풀어주시겠습니까?

    ▷ 서해성 : 봄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 김종배 : 봄, 봄보로봄봄봄.

    ▷ 서해성 : 그건 아니고 봄 중에서도 사실 우리가 요새 잊어버리고 살아서 그렇지 춘궁기에 관한 얘기.

    ▶ 김종배 : 좋은 얘기 좀 해요, 좋은 얘기. 봄인데, 춘궁기, 보릿고개,

    ▷ 서해성 : 네. 인생에서 가장 높은 고개가 바로 보릿고개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정말 이걸 넘어서기 위해서 2천년이 필요했습니다.

    ▶ 김종배 : 2천년동안 그랬다고 봐야 되나요?

    ▷ 서해성 : 그렇다고 봐야겠죠.

    ▶ 김종배 : 하긴 그렇죠. 기아가 해결이, 사실은 기아가 지금 해결됐다고 볼 수도 없어요.

    ▷ 서해성 : 볼 수 없습니다.

    ▶ 김종배 : 아직 밥 굶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런 얘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은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일이 먹는 일이고요. 또 하나는 인간답게 사는 것은 배를 곯는 사람들에 대해서 돌아보는 자세라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없으면 민주주의니 평화니 하는 것들이 갖고 있는 의미가 과연 있는가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 김종배 : 인간다움을 따지려면 먼저 인간으로서 생존이 되어야 되는 건데 그럼 먹어야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기본 중에 기본이 그거지.

    ▷ 서해성 : 이제 꽃이 피는 춘궁기가 시작됩니다.

    ▶ 김종배 : 어찌 보면 역설일 수도 있어요.

    ▷ 서해성 : 네. 역설입니다.

    ▶ 김종배 : 1년 사시사철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좋은 게 봄인데 그때부터 배를 곯기 시작한다.

    ▷ 서해성 : 그렇습니다.

    ▶ 김종배 : 춘궁기는 언제부터 있었다고 봐야 되는 거예요?

    ▷ 서해성 : 인류역사에서 가장 긴 투쟁이 사실은 배고픔과의 투쟁입니다.

    ▶ 김종배 : 그렇죠. 하긴 인류역사의 거의 전부라고 봐도 되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인류역사 전체는 어떻게 하면 배고픔을 면해볼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인류역사는 동시에 기아의 역사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 배불리 먹은 사람은 극히 소수였고요.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배고픔의 선상에서 하루를 사느냐, 못 나느냐가 가장 큰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배고픔을 덜어주는 사람이 성군(聖君)이었습니다.

    ▶ 김종배 : 그렇죠. 맞아요.

    ▷ 서해성 : 그러니까 그 이상의 성군은 있을 수가 없었어요. 요새는 정말 잘 산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고요. 근래에 우리가 말하는 춘궁기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조선시대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 김종배 : 춘궁기라는 단어나 이런 게 등장을 하는 거예요?

    ▷ 서해성 : 네. 그때 이미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임꺽정의 난,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건 설명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춘궁기, 그보다 더한 거니까요. 이게 짧은 전쟁이 아니지 않습니까? 또 엄청난 약탈을 해갔고요. 그리고 순조, 헌종, 철종 때 끝없이 이어졌던 민란, 고종 때 동학혁명, 그리고 일본제국주의 수탈, 한국전쟁으로 인한 국토황폐화, 그리고 60년대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던 보릿고개, 그러니까 이게 그 조선 중기부터는 거의 끊이지 않고 이것이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김종배 : 꼭 이게 옛날 얘기가 아닌 게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그땐 국민학교라고 그랬지만 쌀밥 먹으면 죄인 취급이 되어 가지고 혼식.

    ▷ 서해성 : 혼분식을 장려했죠. 혼식만 장려한 게 아니라,

    ▶ 김종배 : 도시락 검사하고 그랬잖아요.

    ▷ 서해성 : 도시락 검사하고 그랬죠. 그게 박정희 권력이라는 게 그런 권력이죠. 그런 얘기를 같이 해볼까 생각을 하고 있고요. 그리고 이제 배고픔 때문에 아동들, 영아들 사망률이 굉장히 높았습니다. 혹시 참고로 말씀을 드리면 과거에 페스트라는 병이 있었지 않습니까? 페스트라는 병이 페스트균 때문에만 죽은 것은 아닙니다. 사실 지금 인류들에게 다시 페스트가 온다고 그래도 인류의 반이 죽거나 그런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 김종배 : 그러니까 지금 그 말씀은 굶어서 면역력이 떨어지니까,

    ▷ 서해성 : 네. 면역력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페스트에 걸린 사람들의 유해를 요새 인류학적으로 다시 발굴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한 게 아니라 80년대, 90년대 계속 해왔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골밀도가 현저히 낮은 상태로 발굴되고 있습니다.

    ▶ 김종배 : 못 먹으면 뼈의 밀도가 떨어진다 그랬죠?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런 상태로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 전반적으로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먹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것이거든요. 한국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천연두가 왔다든지 호열자, 콜레라죠. 그런 게 왔을 때 일시적으로 떼죽음을 당했거든요. 면역력이 약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을 같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또 하나는 19세기 초반에 요 근래에는 새로운 연구경향들이 있는데 그때 소빙기가 있었는데 소빙기, 빙하기를 말하는 겁니다. 작은 빙하기가 있었는데 그 마지막 시기였다, 그때가. 그러면서 전 세계적인 흉작이 일어납니다, 전 세계적인.

    ▶ 김종배 : 그렇죠.

    ▷ 서해성 : 그러니까 흉작은 당연히 배고픔을 동반하고요. 당연히 배고픈 시대에는 전염병이 창궐합니다. 동시에 그러다 보니까 민심은 이반하고 봉기가 자주 일어나는, 그런 것들도 같이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조선, 그러니까 한국이죠. 조선도 전혀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고 실제로 조선실록에도 그 당시 이상한 기후들이 나타나는 것들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런 것들이 같이 중첩되었다. 그러니까 춘궁기가 상당히 길었다, 우리 한국역사에서, 그런 말씀을 같이 드릴 수 있겠습니다.

    ▶ 김종배 : 그런데 이렇게 못 먹는 것 얘기하면 우리가 흔히 ‘찢어지게 가난하다’ 이런 표현을 쓰잖아요. 이게 어원이 어떻게 되는 거예요?

    ▷ 서해성 :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이 정말 직설법입니다. 사람들이 초근목피하고 살면서, 그리고 때로는 흙가루로 반죽을 해서,

    ▶ 김종배 : 그렇죠. 지금 아프리카 기아 이야기하면 항상 나오는 게 그거잖아요.

    ▷ 서해성 : 우리나라에도 그렇게 먹었거든요. 그렇게 먹은 사람,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 먹었던 거죠. 그렇게 먹고 나면 이제 변이 나오질 않는 겁니다.

    ▶ 김종배 : 그 얘기죠?

    ▷ 서해성 : 네. 변이 나오지 않으니까 항문이 찢어지는 거예요. 실제로 항문이 찢어지는 걸 저가 어렸을 때 봤거든요. 그렇게 되면 부모님들이 그걸 막대기로 파주는 거예요.

    ▶ 김종배 : 저도 소설에서 읽은 기억이 나요.

    ▷ 서해성 : 그런 거거든요. 그리고 그것도 먹을 수 없는 사람들은 냇가에서 돌을 주워 먹는 거예요.

    ▶ 김종배 : 돌, 왜요?

    ▷ 서해성 : 돌을 냇가 아래 있는 돌들을 집어넣고 소금을 약간 뿌린 다음에 끓이는 국을 돌국이라고 합니다. 돌국을 먹었다는 사람을 제 또래에서는 많이 만나봤습니다. 그렇게 했던 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이 정말 궤멸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된장, 간장 덕분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가난해도 그건 담갔거든요. 소금기를 이제 콩과 같이 섭취할 수 있기 때문에 최소한의 영양, 그냥 소금물 먹는 것과는 좀 다른 거거든요. 된장과 간장에 우리는 감사해야 되는, 그런 족속이다. 왜냐하면 한국인만이 갖고 있는 고유한 저장 형태인데 그걸 통해서 한국인이 그래도 죽진 않았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 김종배 : 지금 1112님이 문자 주셨는데 설렁탕에 그 국수사리 들어가잖아요. 사리 들어간 게 쌀이 부족해서 대신 넣던 거라고 문자 주셨는데 맞아요?

    ▷ 서해성 : 그렇게 얘기하는 분도 있고요. 사실 사리에 들어가는 밀가루 부분은 오늘날 백미처럼 넣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은 사실은 6.25 이후에 국수가 일반화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반인들이 국수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거나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그 장면이 잘 묘사된 것은 대장금이라는 드라마에서 대장금이가 밀가루를 얻어가지고 임금에게 접대할 때 얼마나 조심스럽게 다루는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 김종배 : 사실 밀가루가 대중화된 건 원조라고 봐야죠? 미국의 원조,

    ▷ 서해성 : 캘리포니아의 밀이 과잉생산이 되어가지고 당시 소각해야 되는 형태였는데 그걸 미국이 먼저, 그 다음에 한국이 싸게 사오는 그런 과정에서 한국은 물론 그런 과정에서 한국 밀밭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밀이 폭넓게 먹었던 것은 그때였다. 설렁탕에 그렇게 다른 것들도 넣어야만 됐던, 쌀만 가지고는 할 수 없었던, 그리고 탕문화가 발전합니다. 무슨 얘기냐면 양을 늘려야 했기 때문에,

    ▶ 김종배 : 질보다 양?

    ▷ 서해성 : 네. 탕을 하게 되면 사실 세 그릇짜리를 다섯 그릇 만드는 것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소가 지나간 국이 되는 거죠.

    ▶ 김종배 : 슬프다.

    ▷ 서해성 : 그런 것들 같이 생각해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 김종배 : 그런데 우리가 하루 세 끼라고 하지만 하루 세 끼를 따박따박 다 먹은 게 별로 안 되지 않나요?

    ▷ 서해성 : 극히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설이 있긴 합니다만 우선 전통사회에서 농민들은 아침밥을 먹고 나가서 저녁에 집에 들어와서 한 끼를 먹었습니다. 농번기나 아주 일이 많을 때는 새참을 먹었습니다.

    ▶ 김종배 : 그렇죠. 중간에 새참만 먹어도,

    ▷ 서해성 : 그 참이라는 글자도 한자로는 점이라는 글자거든요.

    ▶ 김종배 : 참의 어원이 점입니까?

    ▷ 서해성 : 읽을 때 두 가지 말로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생각보다 우리가 많이 먹지 않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거고요. 고려시대에도 조석으로 먹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점심은 안 먹었을 가능성이 높고요.

    ▶ 김종배 : 하루 두 끼였군요, 기본이.

    ▷ 서해성 : 그런데 원나라의 사신이 오면 세 끼를 제공했다,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아마 이분들한테 잘 보이려고 했던, 대접을 하느라고 그랬다는 걸 봤을 적에는 고려의 지배층 중에 극히 일부는 세 끼를 먹었을 수 있다. 세 끼를 먹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랬다는 기록이 있고요.

    ▶ 김종배 : 두 끼 아침하고 저녁,

    ▷ 서해성 : 네. 그 당시 양은 얼마나 먹었나 짐작해볼 수 있는 게 몽골에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온 백성들에게 하루에 쌀 1승씩을 주었는데 부지기가 굶어죽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 김종배 : 1승이 어느 정도에요?

    ▷ 서해성 : 그 양을 정확하게 고려시대 때 양을 모르기 때문에 적어도 1승 이상은 먹어야 한다는 것들을 알 수 있고요. 그럴 무렵, 그 직후에 나온 기록이 이제 전함을 제작하는데, 일본에 침략하기 위해서, 여몽연합군이 일본에 들어갔지 않습니까?

    ▶ 김종배 : 전투배?

    ▷ 서해성 : 네. 그때 3만 500명이 밥을 해먹었다, 이런 기록이 있는데 그걸 지금 걸로 환산하면 한 끼가 1.88승, 그러니까 아마 2승 정도는 그래도 먹어야 일반인들이 됐던 게 아닌가 하는,

    ▶ 김종배 : 혹시 한 홉, 이렇게 그 정도가 아닌 게 싶은데,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 정도일 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 뒤에 제가 그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과거 생활사를 얘기할 때 아주 잘 인용되는 책이 있는데 송나라 사람 서긍이라는 사람이 쓴 고려도경입니다. 그 책에는 고려 사람들은 하루에 두 끼를 먹는다,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생활설화가 잘 표현이 되어 있는 그런 책이어서 대체로 두 끼를 먹었다 볼 수 있습니다.

    ▶ 김종배 : 그럼 점심의 유래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 서해성 : 점심이라는 말은 사실은 원래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이 말을 쓴 것은 당나라 때 처음 사용했다고 합니다. 한국에 들어온 것은 송나라 때 들어왔을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하고 또 불교용어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긴 한데,

    ▶ 김종배 : 저도 불교용어라고 들어본 것 같아요.

    ▷ 서해성 : 제가 찾아보니까 그렇게 명료하지는 않더라고요. 그리고 과거에는 점심이라는 말이 오늘날 먹는 것처럼 정오에 먹는 걸 말하는 것은 아니었고요. 새벽에 먹으면 조점심, 오전에 먹으면 오점심, 저녁에 먹으면 석점심, 이렇게 표현하는데 그 의미가 마음에 점을 찍는다. 그러니까 점심, 마음에 점을 찍는다, 이런 뜻도 있고 또 하나는 허기가 졌는데 거기에 정신을 차릴 만큼 간단하게 먹는다, 이런 뜻도, 같은 말이겠죠. 그러니까 적어도 조선중기까지는 낮밥, 오늘날 말하는, 점심이라는 말이 요새는 낮밥에 가깝지 않습니까?

    ▶ 김종배 : 낮에 먹는 밥이죠.

    ▷ 서해성 :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렇게만 사용했던 말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아주 그때는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가 왜 중국시장에 가면 딤섬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 김종배 : 요즘 개념으로 간식 비슷한 것 아닙니까?

    ▷ 서해성 : 간식입니다, 간식.

    ▶ 김종배 : 그렇게 봐야 되는 거죠?

    ▷ 서해성 : 중국식당에 가면 우리가 애피타이저 같은 걸 먹는데 딤섬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딤섬이 바로 점심의 중국발음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그렇게 생각하시면,

    ▶ 김종배 : 딤섬을 한자로 쓰면 점심?

    ▷ 서해성 : 네. 그러니까 같은 말이다 생각하시면 될 것 같고요. 사실 양반이나 왕들도 많이 먹었다, 소수는 그랬겠지만 조선시대 왕들은 5번에서 6번인가 밥을 먹었거든요.

    ▶ 김종배 : 하루에요?

    ▷ 서해성 : 네.

    ▶ 김종배 : 뭘 그렇게 많이 먹어.

    ▷ 서해성 : 그런데 사실 따져보면 제대로 된 정식으로 먹은 수라는 오전 10시 그리고 저녁에 먹은 수라 정도이고 나머지는 일종의 간식이었다, 이렇게 보시면 될 것 같고 영조는 사실 정말 하루에 세 끼만 먹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백성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왕들도 그렇게까지 많이 먹지 않았다는 걸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19세기 말이 되면 서울양반이나 시골에 있는 지주들은 세 끼를 먹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 끼가 본격 출현하진 않았지만 거의 본격 출현한 게 19세기말 쯤 된다고 말씀드릴 수 있고요. 이덕모라고 하는 아주 실학의 아주 유명한 그분이 얘기한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침, 저녁을 먹는다, 이렇게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5홉을 먹는다. 그런데 여기서 홉은 현재의 1.5홉 정도 된다고,

    ▶ 김종배 : 5홉이?

    ▷ 서해성 : 네. 다섯 홉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규경이라고 하는 아주 훌륭한 분이 있는데 ‘오주연문장전산고’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름까지는 모르셔도 되는데 이분이 명료하게 써놨습니다. 2월에서 8월까지 일곱 달 동안 세 끼를 먹고 9월부터 정월까지 다섯 달 동안은 하루에 두 끼를 먹는다. 이분이 가장 정확하게 써놓으신 것 같습니다. 성호 이익 선생이 쓴 이른바 ‘성호사설’에는 한국 사람들, 조선 사람이죠. 하루에 7끼를 먹는 사람이 있다. 아주 비난을 해놓은, 그래서 이 진수성찬이 하루에 소비하는 것으로 100명을 먹일 수 있다. 지금 말로 하면 재벌에 대해서 욕하는 것하고 비슷한 건데, 그러니까 이분 종북 계통이시죠. 우리나라 지금 이런 말하면 종북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때 그걸 비판하고 있는 것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분명히 말씀드리는 것은 조선시대보다도 일제시대가 훨씬 더 못 먹었다는 점 말씀드립니다. 친일파들이나 혹은 이상한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일제가 우리를 굉장히 잘 먹인 것처럼 그렇게 되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기영 선생이 쓴 소설, 단편소설 ‘실진’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누에 번데기 같이 늙은 어머니를 굶겨 죽이고 봄싹 같은 어린 누이를 남과 같이 가르치질 못할망정 하루에 두 끼 밥을 못 먹인다.’ 일제강점기 때도 일반인들은 두 끼 정도 먹었다, 이렇게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 김종배 : 그런데 아까 잠깐 기록에도 하루에 5홉을 먹었다. 한 끼 양이 정확히 어느 정도 되는지 더 구체적인 게 있나요?

    ▷ 서해성 :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게 대체로 이걸 짐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밥그릇 크기로 알 수 있는 겁니다.

    ▶ 김종배 : 저 어릴 때 밥그릇 진짜 컸는데,

    ▷ 서해성 : 지금 우리가 먹는 밥그릇이 왜 줄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따가. 고구려 때는 지금 밥그릇의 한 4배,

    ▶ 김종배 : 지금 공기라고 우리가 흔히 부르는,

    ▷ 서해성 : 네. 4배, 그리고 고려시대 때는 3배, 조선시대 때는 2배 정도였습니다. 고구려 때 밥그릇의 무게가 1.3kg 정도 들어간다고, 고려 때는 대략 1kg, 조선시대 때는 한 700g 정도, 현재는 350g 정도,

    ▶ 김종배 : 그런데 저 어릴 때 먹던 밥그릇이 사기 그릇이, 사기가 되게 두꺼웠어요. 무거웠어요, 그릇이.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걸로 짐작해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 말고 현재 다른 형태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 김종배 : 밥그릇 크기 따지면 되긴 되겠네요.

    ▷ 서해성 : 그런데 조선말에 천주교 사람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재미있습니다. 19세기를 얘기하는 거죠. 많은 사람들이 2, 3인분 이상을 쉽게 먹어치운다. 서양기준이겠죠, 그 사람이 봤을 적에는 서양인이 남겨놓은 기록이니까. 우리 교인 중에 한 사람은 나이가 중년인데 내기에서 7인분까지 먹었다. 한국 사람들이 밥심은 대단하신 것 같아요. 그런데 이것은 막걸리 사발 수는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소를 잡았는데 쇠고기가 마음껏 제공돼도 아무도 가득한 접시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게 서양말을 번역하다보니까 이런 게 생긴 건데 고기를 아무리 줘도 다 먹었다는 거죠.

    ▶ 김종배 : 이때는 소고기가 쌌나보다.

    ▷ 서해성 : 그리고 과일을 내놓으면 보통 10개 정도 먹었고 어떤 사람은 50개도 먹었다. 참외도 30개를 먹어치운다, 한 사람이.

    ▶ 김종배 : 30개를, 참외를요?

    ▷ 서해성 : 참외가 조그맸잖아요, 옛날에요. 그렇게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 김종배 : 개똥참외 얘기하는 거구나.

    ▷ 서해성 : 네. 아마 그 당시 우리가 참외 크기를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지금처럼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 김종배 : 30개면 어마어마하네.

    ▷ 서해성 : 그런데 세 끼라는 것이 본격화된 것은 역시 하늘의 뜻이 아니라 공장에서 결정했습니다.

    ▶ 김종배 : 그렇겠네요.

    ▷ 서해성 : 노동형태가 이제 밥을 먹는 걸, 왜냐하면 이게 유럽에서 먼저 나온 건데요. 18세기,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유럽에서 노동시간이 대개 14시간에서 16시간이었습니다. 그러면 아침에 새벽같이 나가서 밤중에 들어온단 얘기지 않습니까?

    ▶ 김종배 : 일을 시키려면 먹이긴 먹여야죠.

    ▷ 서해성 : 먹여야죠. 그러니까 세 끼 문화가 정착이 되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가 곧 세 끼를 만들었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것은 자연스럽겠다.

    ▶ 김종배 : 제가 지금 서구는 어땠는지 여쭤보려고 했는데 이미 얘기가 거기서부터 나오기 시작한다고 봐야겠네요? 그런데 서구의 중세로 가면 어떻게 되는데요?

    ▷ 서해성 : 서구의 중세의 농부들은 사실 아침을 거의 먹지 않고 나가서 대여섯 시간을 일한 다음에 집에 들어와서 밥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아주 중요한 말이 여기 있는데요. 그때 성인남자 한 명이 그때 서구에서 사람들이 쟁기질을 대신 했습니다.

    ▶ 김종배 : 사람들이? 우리나라는 소가 끌고 있는데,

    ▷ 서해성 : 네. 인력이 쌌기 때문에, 그런데 그때 가는 밭의 한 성인남자가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아침을 먹으러 올 때까지, 정오를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10시에서 11시 정도입니다. 그때까지 갈 수 있는 경작 면적지, 그게 모르겐(morgen)입니다.

    ▶ 김종배 : 모르겐이라는 단어가 거기서 나온 건가요?

    ▷ 서해성 : 독일어로 구텐 모르겐, 그게 영어로는 굿모닝이거든요. 아침이라는 말이 사실 이렇게 쓰고는 있습니다만 참 슬픈 말이다.

    ▶ 김종배 : 너 일하고 왔냐? 이 뜻이네.

    ▷ 서해성 : 아니면 내지는 일 잘해. 이게 참 슬픈, 굿모닝이라는 굿을 빼고 나면 모닝이라는 그 말의 어원이 되는 게 모르겐인데 그게 지금의 네덜란드, 그 당시의 홀란트 말입니다. 홀란트에서 생긴 말인데 그 생각을 하면 아침에 밥을 먹지 않고 나가서 정말 예닐곱 시간 일을 하고 들어와서,

    ▶ 김종배 : 힘들어서,

    ▷ 서해성 : 힘든 정도가 아니죠. 거의 쓰러졌겠죠. 케테 콜비츠라고 하는 유명한 판화가가 있는데 바로 그렇게 한 성인남자가 쟁기질을 하는, 자기 등에 쟁기를 달고 하는 그 그림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는 집에 다시 저녁에 해가 질 무렵에, 해가 지기 전에 옛날에 밥을 먹었거든요. 불을 켜는 게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반인 사람들한테 그렇게 불을 켤만한 형편이 못되었죠. 그러니까 해가 지기 전에 밥을 먹고 일찍 잠에 들었던 거죠. 서구사회 중세의 농민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해볼 수 있겠죠. 로마에서, 고대 로마에서는 대개 하루에 한 끼 먹었습니다. 조금 먹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되고요. 그 사람들 철학이 소화가 잘 되는 것이 건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거든요. 그래서 대개 한낮에 먹는 것을 세너(cena)라고 그러는데 영어로는 디너로 번역합니다.

    ▶ 김종배 : 디너는, 그런데 한낮에 먹는 거라고요?

    ▷ 서해성 : 한낮에 먹었습니다. 대개 한낮에 먹었는데 그때는 아주 많이 먹었습니다.

    ▶ 김종배 : 한 번 먹는데 왕창,

    ▷ 서해성 : 많이 먹었습니다. 많이 먹었고, 그리고 사실 많이 먹기 위해서 거위깃털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 김종배 : 왜요?

    ▷ 서해성 : 토하기 위해서,

    ▶ 김종배 : 심했다.

    ▷ 서해성 : 그래서 거위깃털을 집어넣어서 밖에 나가서 토하고 와서 또 먹었습니다.

    ▶ 김종배 : 요즘으로 하면 무식하다고,

    ▷ 서해성 : 네. 그리고는 식당이라고 할까요, 레스토랑? 아니면 개인 집에 있는 식당에 바닥에는 새우, 물고기, 이런 것들을 그려놓고 굉장히 우리는 음식을 많이 먹는다. 이를테면 그런 것들을 거기다 그렇게 표현해놨는데 그러니까 나머지 시간은 배가 고팠겠죠. 그러니까 간식 같은 걸 했고요. 그렇게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 김종배 : 그러니까 지금 기억나는 게 결국은 쌀밥이라고 하는 게 갖고 있는 게 예를 들어서 70년대 남북체제경쟁하고 이럴 때, 이때 나왔던 이야기가 북한에서 ‘이밥에 소고기국’ 이런 얘기 나오고 했던 게 다 이런 연장선이라고 봐야 되는 거잖아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김일성이라는 사람이 늘 자주했던 말이, 북한의 지도자 말하는 겁니다. 쌀이 곧 공산주의다. 이밥에 고깃국을 먹기만 하면 된다, 이런 말이 있는데요. 이밥이라는 말의 어원은 조선시대 때 과전법 때문에 생겼습니다.

    ▶ 김종배 : 어떻게 되는 건데요?

    ▷ 서해성 : 그전에는 일반농민들이 농사를 지어도 쌀밥을 먹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이씨 조선이 되어가지고, 이 씨들이 권력을 잡자 밥이 생겼다는 겁니다. 과전법은 당시에 진보적인 법이었습니다, 초기에는. 나중에 과전법이 무력화됩니다만 과전법이라는 말뜻은 과로 준다. 여기서 과라는 건 전문직, 그 말입니다. 사실 과전법의 원래 뜻은 세습전이 아닙니다. 나중엔 다 세습됐습니다만 조선 초기에는 백성들이 세금의 전체량이 작았기 때문에, 그러니까 당연히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서도 그랬겠죠? 그러니까 그때 사람들이 이 씨 조선이 되니까 우리가 드디어 쌀밥을 먹는구나. 그래서 이밥이라고 했습니다.

    ▶ 김종배 : 그래서 이밥이 된 거예요?

    ▷ 서해성 : 그렇게 되었는데 이제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한국인들이 주로 감자, 옥수수, 이를테면 이런 것들을 많이 먹고 살았습니다. 그 이유가 일본이 우리 쌀을 대부분 강탈해갔기 때문에 그리고 사실 대체작물로 일본이 권했던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화전민도 급격하게 늘었고요. 조선시대보다 훨씬 더 못 먹었습니다, 실제로 일제시대 때. 그러다가 그게 끊어지지 않고 해방이 되었고 계속해서 빈곤이 악순환 되는 그런 상태가 되었습니다. 또 미군정이 초기에 쌀 조절을 잘못했습니다. 쌀 조절을 잘못해가지고 쌀값이 한때 오르게 되는 게 1200% 가량 급등합니다. 45년도 11월이 되면 해방 당시보다 1200%, 그러니까 월급쟁이들은 쌀을 먹을 수 없었고,

    ▶ 김종배 : 12배를 뛰었다는 거잖아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렇게까지 올랐고 그랬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계속 이어졌던 것이죠. 그런데 북한과 이른바 쌀을 통한 체제경쟁이 벌어졌던 거죠. 그게 새마을운동과 같이 맞물려있는 건데요. 박정희 시대 때는 한마디로 말하면 쌀의 시대였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 김종배 : 시간이 다 되어서 더 이상,

    ▷ 서해성 : 벌써 다 됐습니까?

    ▶ 김종배 : 네. 저는 지금도 박정희 정권 70년대 통일벼 해가지고 쌀 수확량이 왕창 늘었네, 이런 얘기 맨날 뉴스로 때리고 했던 게 저는 지금 얼핏 기억이 나는 것 같아요.

    ▷ 서해성 : 네. 그 이면에 있었던 얘기를 한 가지만 말씀드리면요. 73년도에 김현옥 시장이 서울시에 표준식단을 제시하고 그리고는 밥공기를 정해줬습니다, 사이즈를. 밥공기가 작아진 이유입니다.

    ▶ 김종배 : 이게 그 계기에요?

    ▷ 서해성 : 네. 그래서 나중에 최종적으로 도달한 것은 지름 10.5cm, 높이 6cm로 정했고 한 번 위반하면 1개월 영업정지, 두 번 위반하면 허가취소를 했습니다.

    ▶ 김종배 : 독재니까 독재가 별걸 다 정했네.

    ▷ 서해성 : 국민이 먹는 밥의 양까지 조절해줬던, 아까 말씀하셨던 도시락을 싸갖고 오는 것도 그렇게 통제했던 것이죠.

    ▶ 김종배 : 그렇죠. 이제 마무리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 서해성 : 네. 지금 현재 전 세계의 빈곤, 절대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이 대략 8억 명입니다.

    ▶ 김종배 : 많네요.

    ▷ 서해성 : 그중에는 북한도 들어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데 우리가 한동안 정치세력들이 북한에 쌀을 주면 그걸 퍼주기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우유 주는 것도 퍼주기라고 그러고요, 분유 주는 것을요. 아직까지는 쌀로는 핵무기를 만들지 못합니다.

    ▶ 김종배 : 그렇죠.

    ▷ 서해성 : 인도주의문제하고 이건 정말 구분해야 되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은 돌아보지 않는 풍요라고 하는 것은 거짓 풍요이고 위선의 풍요이고 잔인한 풍요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꽃이 피는 철입니다. 꽃이 피면 가난한 사람들 돌아보는 그런 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김종배 : 알겠습니다. 이렇게 마무리하면서 서해성 작가 보내드려야 될 것 같습니다. 오늘 수고하셨어요.

    ▷ 서해성 : 고맙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제공 tbs3@naver.com / copyrightⓒ tbs.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
카카오톡 페이스북 링크

더 많은 기사 보기

정치 추천 기사

인기 기사



개인정보처리방침  l  영상정보처리기기방침  l  사이버 감사실  l  저작권 정책  l  광고 • 협찬단가표  l  시청자 위원회  l  정보공개

03909 서울특별시 마포구 매봉산로 31 S-PLEX CENTER | 문의전화 : 02-311-5114(ARS)
Copyright © Since 2020 Seoul Media Foundation TBS.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