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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성의 박학다설] 잠들지 못하는 섬, 제주도

조주연

tbs3@naver.com

2018-04-13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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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성 작가
서해성 작가
  • * 내용 인용시 tbs <색다른 시선, 김종배입니다>와의 인터뷰 내용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방송 : 2018. 4. 13. (금) 18:18~20:00 (FM 95.1)
    ● 진행 : 김종배 시사평론가
    ● 대담 : 서해성 작가

    [서해성의 박학다설] 잠들지 못하는 섬, 제주도

    ▶ 김종배 : 네, 앞서 예고해 드린대로 오늘 3부와 4부를 터서 1시간 통으로 특집 박학다설을 꾸며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 주인공 우리 시대의 지식광대 서해성 작가 모셨습니다. 어서 오세요.

    ▷ 서해성 : 네, 안녕하셨습니까.

    ▶ 김종배 : 일단 이 물 한 잔 쫙 들이키셔야 될 것 같습니다.

    ▷ 서해성 : 네.

    ▶ 김종배 : 목이 많이 마르실 것 같은데 1시간 동안 말씀을 해 주시려면. 근데 오늘 본주제 들어가기 전에 저희 프로그램이 시작되자마자 많은 분들이 문자로 질문을 주셨어요. 오늘 뉴스 나왔죠. 뭐냐면 임시정부 수립일, 4월 13일에서 4월 11일로 바뀌기로 했다, 내년부터. 이거 어떻게 된 스토리인 거예요?

    ▷ 서해성 : 제대로 된 결정입니다.

    ▶ 김종배 : 아, 그래요?

    ▷ 서해성 : 네, 그 동안 정부에서 이제 임시정부 기념일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가 임시정부 기념일 나중에야 만들었는데 80년대 후반에야. 만들었는데 그 임시정부 기념일이 4월 13일로 되어 있었습니다.

    ▶ 김종배 : 네.

    ▷ 서해성 : 근데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부가 기념일 자체를 잘못 설정했던 것이고요. 그 당시 4월 13일이 됐던 이유는 일본의 정보보고서, 그러니까 간첩들 보고서죠, 그러니까.

    ▶ 김종배 : 아, 잠깐만. 그거 보고 날짜를 그렇게 정했다고요?

    ▷ 서해성 : 네, 그 당시에, 그래서 그때는 그렇게 알려져 있었는데요. 임시정부 의사록, 그러니까 지금으로 말하면 국회 속기록이죠.

    ▶ 김종배 : 네.

    ▷ 서해성 : 거기에 이제 1919년도 그 4월 10일날 밤 10시부터 그 익일, 그러니까 그 다음날 10시까지 12시간 동안에 토론을 했다. 그래서 그리고 나서 그 나라 이름을 대한민국으로 하기로 했다, 이런 기록이 명백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4월 11일로 옮기는 것이 맞는데 마침 우리 문재인 정부에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이게 최종적으론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야 될 겁니다, 법적으론.

    ▶ 김종배 : 네, 아니 근데 좀 황당한데 다른 것도 아니고 그럼 일제 일정의 첩보보고서를 기초해서.

    ▷ 서해성 : 근데 그 당시에 우리가 학술적 연구가요. 왜 그럼 이렇게 됐느냐? 단지 정부만의 잘못이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 김종배 : 그래요?

    ▷ 서해성 : 왜냐면 우리가 일제강점기 때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일, 지난 시간에 얘기한 적이 있었던 같은데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3.1운동, 3.1혁명.. 하여튼 뭐 그런 일인데 그런 데 대한 심도있고 정말 밀도있는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었다고 한다면 그렇지 않았을 터인데 어느 부분에서 그렇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 3.1운동에 관한 부분이 일정하게 연구가 있었는데 그것보다는 이제 민주공화제에 대한 연구는 아주 미진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제 임시정부 기념일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 스스로, 우리 스스로 그렇게, 그 동안도 우리가 3.1운동으로 봤지 임시정부가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거든요. 그런 과정에서 이런 것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 자료는 접근하기 쉬웠거든요. 일본이 남겨놓은 자료이니까.

    ▶ 김종배 : 아무리 그래도. 그 이 자료에서 여러 차례 저희도 전해드린 바가 있습니다. 서해성 작가께서 서울시하고 함께 내년도 임시정부 수립100주년 준비를 하고 계시잖아요.

    ▷ 서해성 : 네.

    ▶ 김종배 : 혹시 이것도 그 우리 작가님 작품이십니까?

    ▷ 서해성 : 그거까지, 제가 이 요구를 해왔었죠. 4월 11일로 벌써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을 수십 차례 해왔고요. 그러면서 늘 얘기했죠. 그러면서 제가 서울시를 하고 있기 때문에 저는 4월 13일날 행사를 해 오곤 했었죠. 왜냐하면 이 행정기관이기 때문에 항의는 할 수 있지만 그걸 제가 일방적으로 바꿀 수 없지 않습니까?

    ▶ 김종배 : 그런데 그 바꾸는데 100년 걸렸다는 건 좀 그런데.

    ▷ 서해성 : 그렇죠. 근데 오늘 다행스럽다고 할까요. 아니면 슬프다고 할까요. 상하이에서 지금 보훈처 주관으로 오늘 임시정부 기념행사를 하고 있는데 아마 이게 거의 없었던 일입니다. 그래도 하고 있다는 자체가 놀라운 일이고요.

    ▶ 김종배 : 알겠습니다.

    ▷ 서해성 : 내년부터는 4월 11일날 하게 될 것 같습니다.

    ▶ 김종배 : 아무튼 100년 안 넘긴 게 다행이라고 생각을 해야 되는 거죠?

    ▷ 서해성 : 네, 99년에 바꿨으니까.

    ▶ 김종배 : 아오, 그냥 그렇게 자위하고 넘어가죠.

    ▷ 서해성 : 그렇게 하시죠.

    ▶ 김종배 : 자, 오늘의 본주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요. jh55님께서 ‘메모 준비 끝’ 이렇게 지금 문자를 주셨습니다. 오늘 어떤 말씀해 주시려고?

    ▷ 서해성 : 오늘은 그렇게 좋은 임시정부 기념일처럼 좋은 얘기를 했으면 좋을텐데 오늘은 학살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고자 합니다.

    ▶ 김종배 : 학살.

    ▷ 서해성 : 네, 제가 이 시간을 1시간 동안 하려고 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분단이라고 하는 것이 그냥 오지 않았고 그것은 거대한 학살을, 학살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이고, 오늘날 우리 분단의 성격을 규정하게 된 중대한 사건, 제주4.3에 대해서 얘기를 해 볼까 생각을 하고 왔습니다.

    ▶ 김종배 : 지난주에 제주4.3을 잠깐 언급을 하셨지만, 그 원인인 어떤 경찰이나 군의 민족 DNA가 없다. 역사적 연원 이것만 쭉 파다 보니까 제주는 제대로 조명을 못 했는데 오늘 그 이야기를 한 번 해 보자고.

    ▷ 서해성 : 현재도 제주4.3, 일종의 추모 주간 같은 그런 시간이고 꼭 4월 3일 아니어도 학살에 관한 문제는 몇 가지 짚어 볼 필요가 있는데요. 하나는 이제 우리 분단체제의 성질을 규정한 일이라는 것, 그리고 국가폭력이라고 하는 것에 의해서 사람들이 희생되었다고 하는 점.

    ▶ 김종배 : 그렇죠.

    ▷ 서해성 : 세 번째는 인권적 차원에서 이런 반인륜적행위 이걸 이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개념으로 이야길 하면 crime against humanity, 인륜에 반하는 범죄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결국 이런 것들을 깊이 돌아봄으로써 역사, 분단과 그리고 우리 일상에 인권에 관한 문제도 같이 짚어 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김종배 : 알겠습니다. 그럼 제주부터 이야길 해야 되는 거죠?

    ▷ 서해성 : 네.

    ▶ 김종배 : 4.3 전후 제주도. 얼마나 살았던 거예요, 주민이?

    ▷ 서해성 : 사람이 대략.. 먼저 말씀드리기 전에 4.3을 언급하는 것은 굉장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냥 사건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건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혹시라도 저나 김종배 선생님이 혹시라도 약간 어긋난 말을 하더라도 그것이 본의 아니게 나오는 말이라는 점을 미리 말씀드리고 가고 싶습니다. 왜냐면 수많은 분들이 돌아가실 일이기 때문에 조금도 그 분들의 삶을 폄훼하거나 그런 가치는 추오도 없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겠습니다. 제주도에는 이제 그 당시 일제기록을 보면 해방 직후 직전 25만 명 정도가 살고 있는 전라남도에서 가장 큰 군이었습니다, 그러니까.

    ▶ 김종배 : 그 때는 전라남도의 한 군. 제주군, 전라남도 제주군.

    ▷ 서해성 : 네, 그렇습니다.

    ▶ 김종배 : 25만 명 정도.

    ▷ 서해성 : 그런데 해방이 되면서 대략 5만에서 6만 정도의 사람들이 유입, 밖에 나가 있던 인구들이 이제 들어오게 됐습니다.

    ▶ 김종배 : 25만 플러스 5내지 6만을 더해야 되는 거네요.

    ▷ 서해성 : 네, 30만 정도 잡아야 될 것 같습니다.

    ▶ 김종배 : 그렇군요.

    ▷ 서해성 : 네, 그러니까 근데 이 대목이 중요한데 다른 지역보다는 이렇게 외부에 나가있던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고 생각 하시면 되겠습니다.

    ▶ 김종배 : 그래요? 자, 근데 4.3으로 그러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겁니까?

    ▷ 서해성 : 그 현재 정부 통계 대통령께서도 얘기했습니다만, 현재 많게는 8만 명 잡는 사람도 있고요. 작게 잡는 사람이 3만 명 정도 잡고 있습니다.

    ▶ 김종배 : 3만에서 그 9만까지 이야기를 하는 분 있더라고요.

    ▷ 서해성 : 네, 그런 분 있습니다. 대략 오늘 대략 3만 정도 얘기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은 하고 있습니다만 어떤 생명이나 거대한 죽음을 숫자로 산술하는 일은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그 왜냐면 그 생명값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아우슈비츠에서 590만 명이 죽었다. 이렇게 말할 때마다 저는 섬뜩한 게 590만이라는 저마다 하나가 다 고유한 생명인 것이고 거룩한 생명인데 그렇게 숫자로 환산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 김종배 : 아, 9만이 아니라 9명 중에 1명이 죽었다, 그 얘기를 제가 전에 인터뷰를 통해서 들은 바가 있어요.

    ▷ 서해성 : 네, 그러니까 3만이기 때문에 9명 중에 1명 정도 되는 것입니다.

    ▶ 김종배 : 그렇죠. 그렇게 되는 거죠.

    ▷ 서해성 : 그러니까 대략 10명 중에 하나 내지는 9명 중에 1명 죽은 걸로 보고 있습니다. 이게 최소 숫자입니다.

    ▶ 김종배 : 그러니까요.

    ▷ 서해성 : 당시 60년대 제주도지사가 정부에 보고 한 것을 보면 거기에도 한 7만 가까이 보고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현재까지 정확한 통계가 없기 때문에. 그러나 하여튼 최소로 봤을 때도 적어도 9명 중에 1명, 혹은 10명 중에 1명 정도는 사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김종배 : 그러니까 9명 내지 10명 중에 1명이라고 그러면 그 때는 이제 한 가족의 구성원 숫자를 생각을 하면 한 집에 1명 씩은 희생자가 있다고 볼 수가 있는 거잖아요?

    ▷ 서해성 : 거의 1.5가족 당 1명씩 죽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 김종배 : 그러니까요.

    ▷ 서해성 : 근데 이거 참 이게 그 한국전쟁에서 한국인들이 죽은 숫자가 대략 250만에서 300만명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이 또한 그 당시 3천만으로 봤을 적에 해외거주까지. 해외거주 당시 6.25 당시에 해외거주자 대략 동포가 400만 정도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한 2,500만 정도가 한국에, 남북한에 살고 있었는데 그 당시에도 250만 300만 정도 죽었습니다. 그때도 10명 중에 1명 정도가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얘기냐면요. 4.3은 일종 한국전쟁의 예비작 압축판 같은 겁니다.

    ▶ 김종배 : 그렇네요.

    ▷ 서해성 : 네, 그렇게 그러니까 제주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여 봤기 때문에 어쩌면 한국전쟁도 그만큼 잔인하게 진행되었다. 근데 이 말씀은 이게 방송을 하고 있습니다만, 3만이니, 300만이니 이런 말을 언급하면서 제가 제 자신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지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몇 십만, 몇 백만이 죽었다는 얘기는 그렇게 숫자로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면 정말 생각하지 않습니다.

    ▶ 김종배 : 그렇지요.

    ▷ 서해성 : 이런 거대한 집단학살은 국가폭력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 김종배 : 근데 왜 제주도 있을까요?

    ▷ 서해성 : 그러게 말입니다.

    ▶ 김종배 : 그렇잖아요?

    ▷ 서해성 : 네, 그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니깐 제주도 역사를 좀 짚어 봐야 될 거 같습니다. 아무래도 간략하게라도.

    ▶ 김종배 : 네.

    ▷ 서해성 : 제주도는 오랫동안 탐라라고 그래서 한반도 혹은 육지 권력의 변방이었습니다. 그니까 그 사실 지금하고 달리 오랫동안 유배지였지 않습니까?

    ▶ 김종배 : 광해군도 쫓겨나서 제주도에 유배가고.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김정희도 그렇게 끌려가고.

    ▶ 김종배 : 맞아, 추사 김정희.

    ▷ 서해성 : 네, 그러니까 사실은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제주도 일종의 유배지였죠.

    ▶ 김종배 : 그렇죠.

    ▷ 서해성 : 네, 사실 그때는 부산하고 목포 뭐 이런 데서 가는 배가 아니고는 제주도 가는 거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죠.

    ▶ 김종배 : 네.

    ▷ 서해성 : 그러니까 그 당시에 한국전쟁, 4.3 당시에도 이쪽으로 발령 난 군인들이 대개는 유배지에 간다고 생각하고 갔습니다.

    ▶ 김종배 : 4.3 직전에도?

    ▷ 서해성 : 직전에도 4.3당시에도 그러니까 가령 이제 나중에 제주도 좋은 일, 다른 군인보단 덜 잔인했던 김익렬 부연대장 중령인데요. 그만 하더라도 당시 송호성 총사령관하고 워낙 좀 어긋나서 그 사모님한테 명동에서 만나는데 경례를 안 했던 모양이에요.

    ▶ 김종배 : 네.

    ▷ 서해성 : 네, 그래서 제주도로 전근이 났는데 그 당시에도 이제 제주도 가면 출세 못하는 그런 것으로 간주 되었는데 4.3사건이 나서 출세하는.

    ▶ 김종배 : 그러니까 쉽게 얘길 하면 제주도는 유배지라고 딱 선입견이 박혀 있으니까 그 유배지라고 하는 어떤 편견.

    ▷ 서해성 : 그렇습니다.

    ▶ 김종배 : 거기서 제주도민에 대한 편견으로 연결이 되는.

    ▷ 서해성 : 제주도민은 사실은 한국민이라기보다는 제주도민이었죠.

    ▶ 김종배 : 그러니까.

    ▷ 서해성 : 네, 섬사람이었고 그리고 오랜 동안 국가의 갈취대상이었지, 그들의 권익을 옹호 받는 그런 곳은 아니었죠. 그리고 제주도 사람은 세금은 높았고 혜택은 없는, 이런 국민으로서 왕조시대 때도 국민으로 대접받았다기보다는 그러다 보니까 제주도 사람들 굉장히 소유심이 아주 심했고요.

    ▶ 김종배 : 아니 근데 그냥 참고 살아요?

    ▷ 서해성 : 그러게 말입니다. 그러니깐 제주도 사람들에게 불만이 상당히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서게 되면 항쟁으로 조직되어서 나타납니다.

    ▶ 김종배 : 아, 그래요?

    ▷ 서해성 : 4.3항쟁도 우익만은 아니다. 그냥 단지 좌우익 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 김종배 : 네.

    ▷ 서해성 : 몇 가지만 이제 짚어보면 이렇습니다. 뭐 양제해의 난도 있었고 방성칠의 난, 이재수의 난, 영화로도 나왔지 않습니까, 이재수의 난.

    ▶ 김종배 : 이재수의 난은 꽤 알려진 거죠.

    ▷ 서해성 : 네, 그런 것들이 있었거든요. 근데 이게 제주에서 항쟁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냐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4.3까지 포함해서. 사실 제주도 굉장히 작은 섬입니다. 그쪽에서 항쟁이 일어나면 사실은 육지에 사는 것하고는 비교할 수 없이 생명이 많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 김종배 : 어디로 갈 데가 없잖아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이 이제 전국적으로 궤멸될 수밖에 없는 운명 이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봉기 했겠습니까? 그만큼 참을 수 없었다는 겁니다.

    ▶ 김종배 : 그게 저는 그 설명 말씀 듣다 보니까 홍경래의 난이 지금 떠오르는데 그러니까 그 평안도 사람들에 대한 어떤 차별, 이것 때문에 이제 그 중앙 관직에도 진출을 못하고 이것에 대해서 참다 참다 들고 일어난 사건, 우리 흔히 그렇게 이해를 하고 있잖아요. 비슷하게 보면 되는 거지요.

    ▷ 서해성 : 그렇죠. 그러니까 그 홍경래가 정주에 가서 나중에 성에 은거하는 이유도 정주가 단일지역으로는 과거합격자가 아주 많은 데입니다.

    ▶ 김종배 : 아, 그런가요?

    ▷ 서해성 : 그런데 중앙관료는 1명도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그쪽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저항의식은 높을 수밖에 없었던 거죠.

    ▶ 김종배 : 차별 받는다는 어떤 피해의식과.

    ▷ 서해성 : 명백하게 차별했죠.

    ▶ 김종배 : 그러니까요.

    ▷ 서해성 : 제주도도 명백하게 차별했죠. 그러다 보니깐 이 분들이 갖고 있는 그런 분노 같은 것들이 DNA가 아예 있다 이렇게 보는 것도 사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 김종배 : 그러면 최근 현대 정치에서 제주에서 무소속 출마자가 당선이 많이 되는 것도 이런 역사적 뿌리하고 연결이 될 수 있는 거예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어느 정당을 선택하지 않아 버리는 거죠.

    ▶ 김종배 : 네.

    ▷ 서해성 : 도리어 일종의 냉소주의 같은 것들이 좀 반영되어 있다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근래에 와서는 민주당 계열이 좀 많이 당선되어 왔습니다.

    ▶ 김종배 : 그게 이제 4.3특별법 제정을 위한.

    ▷ 서해성 : 그렇습니다. 4.3특별법 하게 되니까 사람들이 이제 좀 민주당 쪽을 많이 찍었는데 재밌는 것은 지난 대선에서는 박근혜 후보를 더 높게 지지 했습니다.

    ▶ 김종배 : 알겠습니다.

    ▷ 서해성 : 그때 박근혜 후보도 4.3 그걸 공약 했어요. 그러니까 제주도 사람들한테 이런 게 있는 거죠. 진보냐 보수냐가 아니라 보수가 4.3을 공약하면 더 지킬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적어도 학살은 덜하지 않을까? 이를 테면 이런 마음들이 은닉되어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 김종배 : 이게 그 제주 4.3의 미군정으로부터 시작이 되는데 꼭 미군정만 갖고 이야기 할게 아니라 역사적으로 같은 민족들이 같은 민족이어도 제주도민을 엄청나게 멸시를 해 왔다.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것들을 다 빼고 얘기할 순 없다는 겁니다. 제주도 사람들이, 그니깐 해방당시 4.3당시에 제주도민들의 마음에는 두 가지 광복이 필요했습니다. 육지 사람들은 하나의 광복만 있으면 됐습니다. 일제식민지로부터 광복을 맞으면 되는 거죠.

    ▶ 김종배 : 그렇죠.

    ▷ 서해성 : 그런데 제주도민들은 바로 차별에서 오랫동안 육지 사람이 해오던 차별에서 광복하고 싶은 자주의식, 그러니까 영토 내에 자주의식이죠. 또 하나는 식민지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자주의식. 이중적 광복의 과제를 제주도가 안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열망 또한 높았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프랑스가 독일에서 해방되었을 때는 프랑스 식민지의 여러 나라들이, 사실은 같이 자기도 해방된 줄 알고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프랑스군이 독일에서 해방되자마자 바로 그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죠. 너희들은 그냥 식민지인데 무슨 해방이냐? 이렇게 한 것과 마찬가지죠. 그러니까 그 좌절들이 이제 그 프랑스 사람들을 더 미워하게 되는 이유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제주도 사람들은 당연히 해방될 당시에, 그리고 새로운 국가가 수립된다면 적어도 이중적 해방을 맞고 싶었던 거죠.

    ▶ 김종배 : 바로 그런 점에서 제주도민들이 저항의식은 높았던 것이고, 반대로 어떤 그 육지에서 넘어갔던 군경은 오히려 멸시감이 컸기 때문에 그 학살을 그렇게 저질렀던. 이렇게 보면 되는 겁니까?

    ▷ 서해성 : 정확한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씀 드리면 안 됩니다만 과거에 이런 인식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섬놈들’.

    ▶ 김종배 : 네.

    ▷ 서해성 : 그 말 속에 ‘뱃놈들’. 이 말은 굉장히 비하하는 말이었거든요.

    ▶ 김종배 : 그렇죠.

    ▷ 서해성 : 그런 놈들인데 이런 놈들이 말을 안 듣고 이제 우리 각하에게 덤비는, 이런 거 용납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의식이 같이 있었다.

    ▶ 김종배 : 근데 그 말씀 듣다 보니까 해방 후 말고 그러면 일제강점기 때는 어땠는데요?

    ▷ 서해성 : 네, 일제강점기는 아주 간략하게 요약을 드리면요. 어쩌면 한국에서 가장 먼저 일제에 저항한 데가 제주도입니다. 1880년대에 잠녀, 제주도로 해녀가 없고 잠녀라고 합니다. 해녀라는 말이 일본말로 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 김종배 : 아, 잠깐만요, 그래요? 제주도에서는 잠녀라고.

    ▷ 서해성 : 잠녀라고 합니다. 잠수한다 이 말이죠.

    ▶ 김종배 : 아, 해녀는 일본에서 온 말입니까?

    ▷ 서해성 : 네, 그러니까 그 잠녀들이 일본인들이 여기 와서 이제 그 출가투쟁. 무슨 얘기냐면 집을 나온다는 얘기가 아니고 자기 집을 떠나서 잠수해서 전복 같은 하는 걸 출가라고 그러는데 그 일본인들에게 출가하는 것을 반대하는, 이런 투쟁을 이미 1880년대 벌이고 있습니다.

    ▶ 김종배 : 그러니까 일본인들이 남의 어장 와서 싹쓸이는 하는 것 반대한 거잖아요?

    ▷ 서해성 : 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그 때도 제주도 여성들이 싸웠다는 거죠, 그러니까. 그리고 법정사라고 하는 절에서 있었던 항일투쟁. 시간이 없어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또 하나는 이제 1932년 있었던 잠녀투쟁. 세화리에서 있었던 잠녀투쟁. 이건 항일여성사에 아주 빛나는 투쟁입니다. 그러니깐 여성들 1,000여명 정도가 나와 가지고 제주도사에게. 도지사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도지사에게 강력하게 항의하고 그리고 싸웠던 이런 기록인데요. 그러니까 이 기록은 여기저기 많은 기록들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얘기냐면 제주도민은 그때도 이렇게, 일제강점기 때도 이렇게 다양한 형태로 저항했다는 말씀을 드리는 거고. 그때도 그런데 뭍사람들은 이런 제주 그 잠녀들, 해녀들의 투쟁을 방송에서 옮기고 싶진 않은데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그냥 옮겨보겠습니다. 이런 투쟁을 ‘제주년들이 투쟁’ 뭐 이렇게 말을 했다는 건, 이런 비하하는 것이 육지 사람들 일반적인 태도에 속했다, 이렇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 김종배 : 아, 이게 뿌리가 깊었군요.

    ▷ 서해성 : 그러니까 제주도라는 것은 한국 내에, 그 당시 한국은 아닙니다만.. 조선 내에서 내부 식민지적인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 김종배 : 근데 제주도 아까 전라남도 제주군이라고 했잖아요?

    ▷ 서해성 : 네.

    ▶ 김종배 : 도가 된 건 언제에요?

    ▷ 서해성 : 도가 된 건 1946년도에 비로소 도가 됩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말하는 도라는 건 지역으로서 도(道)를 얘기하는 겁니다. 섬 도(島)자가 아니고. 그러니까 우리가 오늘날 쓰는 건 섬 도자가 아니고 제주도. 프로빈스(province) 개념으로 쓰고 있는데 그러면 비로소 1946년도에 와서야 이제 전라남도에서 분리되는 그런 상황입니다.

    ▶ 김종배 : 네, 그렇게 되는 거고. 자, 그러면 제주도에 일제강점기 때도 이렇게 저항하고 했는데 해방 직전 상황은 어땠는데요?

    ▷ 서해성 : 해방 직전에 여러분 들으시면 좀 놀라시겠습니다만, 제주도민들은 무기가 그렇게 낯선 동네가 아니었습니다.

    ▶ 김종배 :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 서해성 : 무슨 평화의 섬인데 무슨 무기냐,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일본군 2차 대전, 미국 말로 태평양전쟁이죠. 일본말로 대동아전쟁이겠죠. 대동아 전쟁의 최고 거점 중에 하나로 제주도를 설정 하고 있었습니다.

    ▶ 김종배 : 아, 저 뉴스로 봤어요. 그 굴 파서 방공포 숨기고 했던 데 맞아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제주도에는 6개 보병사단 기갑여단으로 구성된 그리고 또 해군, 공군. 공군도 거기 가면 이제 그 비행장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자그마치 최대 많을 땐 25만(병력)이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 김종배 : 그때 제주도민 전체.

    ▷ 서해성 : 제주도민보다 더 많았어요. 그러니까 어마어마한 군인들이 당시 제주도 있었다는 점을 말씀을.. 물론 이제 떠나고 해방될 당시에는 7만 명 정도 가까이, 맞았습니다, 거기서 그러니까.

    ▶ 김종배 : 갑자기 강정이 생각이 나네.

    ▷ 서해성 : 그렇죠. 강정이 우연히 아니라는 생각을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강정의 그 위치가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이 바로 난징대학살 때 일본군 폭격기가 이곳을 경유해서 갔는데.

    ▶ 김종배 : 그러니까 강정기지에 대해서 제주도민들이.. 어떤 뭐라고 그럴까요. 문제의식 내지 거부감도 사실을 역사적 뿌리가 있군요.

    ▷ 서해성 : 깊은 겁니다. 깊은 겁니다.

    ▶ 김종배 : 그러네.

    ▷ 서해성 : 그러니까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제주도가 이미 그때 일제 때도 이런 형태의 최후 거점처럼 사용되었고, 난징대학살 때 비행기도 제주도로 거쳐서 갔다는 점입니다.

    ▶ 김종배 : 네, 그러면.

    ▷ 서해성 : 군사기지로서도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는 겁니다.

    ▶ 김종배 : 그렇군요. 그럼 해방 즈음해서, 그 당시에는 어땠는데요?

    ▷ 서해성 : 그러니까 이런 이제 지금 앞에 제주 역사를 간략하게 짚어 봤지 않습니까?

    ▶ 김종배 : 네.

    ▷ 서해성 : 그러니깐 광복 이전에도 이미 항쟁을 잉태할 수 있는 그런 요건들을 제주도민들이 가지고 있었다고 부인할 필요 없다는 겁니다.

    ▶ 김종배 : 역사적 전조현상은 이미 여러 차례 나타나고 있었던 거죠.

    ▷ 서해성 : 네, 너무 오랫동안 차별을 받아 왔기 때문에 그랬다는 겁니다. 그런데 또 하나는 5분의 1에 가까운 사람들이 당시 외지에 갔다 온 사람들이었다고 제가 그랬지 않습니까?

    ▶ 김종배 : 그랬죠.

    ▷ 서해성 : 이 말은 무슨 얘기냐면 현재도 일본에 가보면 우리는 제주도민이 전체 인구의 작은데 재일동포 중에 제주도 사람이 많습니다.

    ▶ 김종배 : 맞아요. 그래요.

    ▷ 서해성 : 네, 그 말은 무슨 얘기냐면 제주도민들이 객지에 나가서 사는 데에 대해서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늘 차별 받고 살았는데 뭔가 새로운 학문을 하고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외지에 나가는 걸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건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요.

    ▶ 김종배 : 그렇지요.

    ▷ 서해성 : 한국에서 보면 변방이었지만, 이분들의 항거와 독립정신. 그러니까 그런 사회적 각성에선 아주 선진적 수준에 있었다, 이렇게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그니깐 제주에서 나중에 4.3항쟁, 혹은 4.3저항. 하여튼 뭐라고 불러 좋습니다만, 그때 그걸 이끌었던 사람들이 일본 유학생, 그러니까 유학을 하다가 학병으로 끌려갔던 사람들, 이런 사람들 중심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주도 사람들이 생각보다 그 당시 학력이 높았습니다. 왜냐면 새로운 세계가 오기 때문에 신학문을 배워서 이 차별을 벗어나야겠다고 신념이 강하기 때문에.

    ▶ 김종배 : 오히려 차별 받는다고 느끼면 어떻게든 공부해서

    ▷ 서해성 : 그렇습니다.

    ▶ 김종배 : 입신양명 해야겠다.

    ▷ 서해성 : 네,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거고요. 지금은 이제 전체 인구의 한 뭐 30분의 1, 혹은 50분의 1정도 밖에 쓰지 않습니다만 제주도 사투리. 보면 전라도 사투리도 아니고 경상도 사투리도 아니고 독특한 제주도만의 사투리를 갖고 있는, 언어를 통한 유대감. 그러니까 제주도 정체성이 아주 강했다. 이렇게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 김종배 : 지금 작가님께서 아주 짧게 잠깐 역사 아주 간략하게 훑었는데도, 그런 얘기 많이 듣는 게.. 제주도에서 이제 가면 어떤 외지인에 대한 어떤 시선 이런 얘기를 많이 하는데 이것이 단순히 섬이고 뭍하고 떨어져 있어서가 아니라 역사적 배경 갖고 있다고.

    ▷ 서해성 : 차별을 받아 왔다는 거지요.

    ▶ 김종배 : 그러니까.

    ▷ 서해성 : 명백하게 차별을 받아왔던. 그걸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 김종배 : 알겠습니다. 일단 어찌 본다면 4.3. 어떻게 역사적으로 잉태되어 왔는가에 대한 어떤 그 전사(前史). 앞 전자를 써 가지고 이거 잠깐 훑어 봤는데요. 제주 4.3하면 이 노래를 안 들을 수가 없죠. 안치환 씨가 부르는 ‘잠들지 않는 남도’ 잠깐 들으시고요. 전하는 말씀 듣고 서해성 작가와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 김종배 : 서해성 작과와 함께 특집으로 박학다설 꾸미고 있는데요. 오늘은 제주4.3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9977님이 문자 주셨는데, 제주4.3사건을 제대로 모르는 국민이 많아요. 더 적극적으로 제대로 알려주세요, 이렇게 문자를 주셨네요. 그래서 오늘 지금 특집으로 꾸미고 있는데요. 조금 전에 3부에서 4.3이 잉태되는 과정이랄까, 역사의 배경에 대해서 짚어봤는데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4.3 이야기를 해야 될 것 같은데요. 그날로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발단?

    ▷ 서해성 : 그렇습니다. 47년도 3월 1일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3.1절이라는 말이, 3.1운동, 이런 말이 없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정식행사 명칭은 3.1투쟁기념행사 제주위원회였거든요. 그 위원회가 했는데 2월 17일 날 그 조직을 만들었는데 미군정에서 이 사람들 행사를 좀처럼 불인정하려고 그랬어요.

    ▶ 김종배 : 인정을 안 하려고?

    ▷ 서해성 : 네. 참고로 말씀드리면 여러분, 그 당시에 우리 정부는 없었고 미군정이 우리를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 김종배 : 그렇죠. 1947년이니까,

    ▷ 서해성 : 네. 그리고 제주도에도 미군정체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여튼 그래서 가까스로 원래 이게 관하고 민이 같이 하던 것이었는데 관 사람들이 다 빠지고 민간 주도로 행사가 진행되게 된 겁니다.

    ▶ 김종배 : 군정이 인정을 안 하니까,

    ▷ 서해성 : 제주도가 교통이 불편했기 때문에 여기저기 흩어져서 행사를 진행했는데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있었던 행사에 한 3만 명 정도가 모인 거예요.

    ▶ 김종배 : 많이 모였네.

    ▷ 서해성 : 지금 해도 엄청난 숫자거든요. 그 사람들이 끝나고 나서 자신들을 표현하기 위해서 약간 집회를, 약간 시위로 이게 발전을 한 겁니다. 그런 과정에서 관덕정 앞에 당시에 지금처럼 경찰들이 자동차를 안타고 말을 타고 다녔는데 그 말발굽에 국민학생이 차였어요. 그런데 차였는데 경찰이 ‘미안하다’ 이래야 되는데 그런 말 안 하고 그냥 도망간 거예요. 그것이 이제 사실은 발단이 된 겁니다. 시민들이 그러니까 경찰이 미우니까, 그 경찰들이 그런데 일제 때 경찰이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경찰에게 돌을 던진 거죠. 관덕정 망루에 있던, 당시 육지에서 파견 나가있던 응원경찰이라는 게 100명 정도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시민을 향해서 발포를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그중에 국민학교 5학년 하나가 죽었고요, 6명 중에서. 하나는 아주머니 한 분이 돌아가셨는데 젖먹이 아이를 안은 채로 총에 맞아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비극적인 사태가 생기고만 거죠. 그것이 모든 4.3의 실질적인 시작이 된 그런 사건입니다.

    ▶ 김종배 :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이념이니 뭐니 아무것도 없는 거잖아요.

    ▷ 서해성 : 그렇죠. 그 당시에는, 그럼 도대체 왜 3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한 군데에 모였을까? 그것도 같이 얘기를 해야 되는데, 우리는 불행하게도 광복을 맞았을 때 우리나라 전체가 대흉작이었습니다. 그리고 미군정은 곡식수급을 자유시장에 맡겼다가 또 강제로 바꿨습니다. 자기들이 정책을 잘못, 군인들이 그걸 잘 알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생필품은 부족했고 전국에 콜레라가 창궐했습니다. 그리고 제주도 밖에서 5, 6만 명이 들어오니까 일자리가 없지 않습니까? 2중, 3중의 그런 문제들이 있었고, 그런데 그때 미군정의 통치는 전반적으로 봤을 적에 정말 무능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데에 대한 어떤 저항의식, 그런 것들 속에서 뭐가 잘 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죠. 그리고 일제경찰을 다시 등용하고, 시민들이 볼 때는 싫었던 일이 일어난 거죠. 그런 과정에서 그날 3월 1일 집회가 있었다, 이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 김종배 : 학생들은 어땠어요?

    ▷ 서해성 : 학생들은 이미 46년부터 맹휴,

    ▶ 김종배 : 동맹휴학.

    ▷ 서해성 : 동맹휴학 같은 것들이 있었고요. 제주도의 학생들이 아주 재미있는 슬로건을 내세웠는데요. “우리에게 드로프스를 먹이지 말라.”

    ▶ 김종배 : 드로프스.

    ▷ 서해성 : 드로프스는 양과자를 얘기하는 겁니다.

    ▶ 김종배 : 드로프스 진짜 오랜만에 들어본,

    ▷ 서해성 : 양과자 반대운동. 일본이 마치 자신들의 공산품을 한국인에 팔았던 것처럼 한국인의 미각 같은 것들, 미국에 의해서 점차 그렇게 된다, 이렇게 생각을 학생들이 했던 거죠. 그날 3월 1일 날 행사에도 양과자 반대시위를 학생들이 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럴 즈음에 3월 10일이 됐습니다. 3월 10일이 되었는데 도청을 시작해서, 도청 공무원부터 경찰 20%까지 포함하는 제주도에 당시에 다니고 있던 직장인 95%가 달하는 4만여 명이 총파업을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사과하라는 거죠. 발포에 대해서, 그런데 사과하기는커녕 500여 명 가량을 검거를 하고, 이렇게 했던 거죠. 당시 미군 정보보고서에는 제주도는 70%가 좌익이다.

    ▶ 김종배 : 70%가요?

    ▷ 서해성 : 네.

    ▶ 김종배 : 아니. 그 얘기 나온 김에, 남로당 얘기를 항상 하잖아요. 전 이름도 안 까먹어요. 김달삼이었나요?

    ▷ 서해성 : 네. 김달삼입니다.

    ▶ 김종배 : 그러면 남로당의 영향이 정말 높았던 거예요?

    ▷ 서해성 : 그렇지는 않습니다.

    ▶ 김종배 : 아니에요?

    ▷ 서해성 : 당시 그러니까 제주도에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당시 중앙당인 남로당 중앙당과 연계해서 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고 보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로당이 그만큼 영향력이 컸으면 당시에 남로당을 검거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주도 경찰서에서, 미군 CIC하고.

    ▶ 김종배 : 제주도에서?

    ▷ 서해성 : 네. 미군 CIC 제주도지부죠, 그러니까. 방첩대를 얘기하는 겁니다. 카운터 인텔리전스 콥스, 이럴 겁니다, 아마 그 CIC가.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이 사람들 다 잡아들였었어요. 그러다가 곧 석방합니다. 무슨 얘기냐면 당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사람들이 이런 폭동을 온전히 조정할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이 있다고 봤다면 석방해 주지 않았겠죠. 그러니까 그렇게까지 영향력이 높지 않았던 것으로 보는 것이 정상적인 것 같습니다.

    ▶ 김종배 : 한 마디로 얘기하면 말 그대로 골수, 이런, 우리가 요즘 흔히 아는 말로 그런 게 아니었다는 거잖아요.

    ▷ 서해성 : 적어도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 김종배 : 그렇고요. 일단 여기서 당시 정세를 다시 한 번 정리를 해야 될 것 같은데요.

    ▷ 서해성 : 당시는 정세가 이런 상황이었죠. 이승만을 중심으로 해서 남한단독정부를 수립하려고 하는 그런 상황이었다는 것이고요. 그리고 5.10 단선, 총선이죠, 우리로서는. 당시로서 5.10 단선이라 그랬습니다. 단독정부수립에 관한 총선이 눈앞에 닥쳐왔습니다. 그런데 우익진영 내에서도 단독정부수립은 갈려있었습니다. 김구선생은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고 있는 그런 상황이었죠. 그러나 미군정과 이승만이 단독정부수립을 밀어붙였죠. 그런데 참고로 미리 말씀을 드리자면 제주도에서는 5.10 단독선거 투표가 사실상 없었습니다.

    ▶ 김종배 : 아예 치러지질 않았어요?

    ▷ 서해성 : 치르긴 했는데,

    ▶ 김종배 : 거부?

    ▷ 서해성 : 투표율이 너무 낮았기 때문에 제주도사람들이 그러니까 육지 사람보다 자주의식이 강했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 김종배 : 아니. 지금 쭉 말씀을 듣다보니까 진짜 민족의식이 엄청 높았네.

    ▷ 서해성 : 네. 그러니까 이게 분단이 들어선다고? 참고로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한국인들에게 분단이라고 하는 것은 서기 668년 이후에, 그러니까 신라가 고구려, 660년에 백제를 병합하고, 그리고 668년에 고구려를 상당부분 병합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계속 우리가 이렇게 살았잖아, 통일된 조국으로요? 그런데 668년 이후에 우리 한국인에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분단이었죠. 제주도사람들은 가장 멀리 살고 있었지만 이걸 수용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3개 선거구에서 투표를 했는데 2개의 선거구는 사실상 투표를 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사실은 49년 5월 10일 날 재투표를 합니다, 제주도만. 그러니까 제주도 사람들이 당시에 가지고 있었던 자주의식 내지는 정권불인정 같은 의식이 굉장히 높았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승만 정부로서는 1948년 8월 15일 이후부터는 이승만 정부지 않습니까? 이승만 정부로서는 제주도사람들이 정말 마음에 안 들었던 거죠.

    ▶ 김종배 : 그런데 아까 발단이 3월 1일, 3.1투쟁기념, 여기부터 시작이 됐다고 하는데 우리는 4.3으로 지금 기억을 하고 있잖아요. 4월 3일에 뭐가 있었던 거예요?

    ▷ 서해성 : 그러니까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럴 즈음에 이런 1년 가까이 이 사람들 구속하고 이런 일이 있었는데 1948년 3월 15일에 어떤 일이 있었냐면요. 제주도 사람들 데려다가 고문하고 이러는데 세 명이 죽었어요. 그런데 그 세 명을 죽인 사람들이 물에 던지려고 했는데 마침 그 가족이 그걸 발견한 거예요. 이해가시죠, 무슨 얘기인지?

    ▶ 김종배 : 가만히 있을 수가 없죠.

    ▷ 서해성 : 있을 수가 없죠. 그러니까 경찰이 때려죽였는데, 그런 데에 대한 사람들이 이 사람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것들이 불거지게 되면서 4월 3일 날 제주도의 민병대, 그러니까 흔히 빨치산이겠죠. 내지는 좌익들, 이렇게 부르는 사람들인데 제주민병대들이 제주경찰서를 습격하게 되면서 오늘날 4.3이라고 하는 사건들이 일어나게 된 건데, 사실 습격의 주요 원인은 이런 정치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제주도 사람들이 당시에 뭘로 먹고 살았냐면요. 생활이 어려워지니까 일본하고 밀무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 김종배 : 그래요?

    ▷ 서해성 : 네. 본토하고도, 육지 본토하고도 경찰을 피해서 일종의 무역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상황이었는데 그런 것들을 서북청년단이 대개 뺏어갔습니다. 거기서 생긴 이익들을, 경찰들도 그렇게 했고, 또 그리고 고문치사, 여성들에 대한 강간, 이런 것들에 대한 보복이었고 초기의 진짜 목표는 경찰에게서 고문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구출하고자 하는 목적이 더 컸습니다. 그래서 경찰서를 습격한 겁니다.

    ▶ 김종배 : 이미 세 명이 죽어나왔으니까,

    ▷ 서해성 : 네. 그리고 수백 명이 갇혀있었으니까요.

    ▶ 김종배 : 그러네요.

    ▷ 서해성 : 그런 것들이었고 당시 슬로건은 복잡하지 않았어요. 그 당시 무장대가 내세웠던 슬로건은 탄압이면 항쟁, 단독정부수립 결사 반대, 이런 정도였던 거죠.

    ▶ 김종배 : 지금 6624님이 문자 주셨는데 ‘작은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할아버지께서 다치셔서 누구보다 그 비극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주도민이셨나 봐요. ‘사상이라는 걸 조금도 모르는 양민들이셨죠’, 이렇게 보내주셨네요. 딱 그건데, 그런데 이게 발단이 그렇게 되는 건데 어떻게 이렇게 악화가 된 거예요, 상황이?

    ▷ 서해성 : 그 당시 4월 말이 되면 무장민병대가 대략 2천 명 정도의 수준을 헤아리게 됩니다. 2천 명이 총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이따가도 말씀드리겠습니다만 대개 무장대를 100명 정도 쏴죽이면 총 하나 회수했습니다. 무슨 얘긴지 아시겠죠, 그러니까? 그냥 총 하나 들고 왔다 갔다 했던, 나머지 사람들은 왔다 갔다 했던,

    ▶ 김종배 : 무장대라고 부르기도 힘든데,

    ▷ 서해성 : 비무장민간인이 대부분 학살이라고 그러는 거죠.

    ▶ 김종배 : 그러니까요.

    ▷ 서해성 : 그러니까 그랬던 겁니다. 그런데 미군정이 1,400명의 본토 경찰을 추가로 파병하고 경비사령부를 만들고 그리고는 해상교통을 차단하고, 이렇게 되니까 점점 산 위로 올라갈 수밖에 없는, 원래 자기 살던 동네에 살 수 없게 되는 이런 상황으로 치달아갔던 것이죠.

    ▶ 김종배 : 아니. 그러면 이렇게 상황이 아주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으면 더 이상의 악화를 막기 위해서 협상을 한다든지 이럴 수 있는 거잖아요. 이런 게 없었습니까?

    ▷ 서해성 : 전혀 없지는 않았는데 아까 말씀드렸던 김익렬 9연대장이 바로 당시 무장대를 이끌고 있었던 김달삼이라는 사람과 구억국민학교에서 이런 회담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건 정말 재미있는 건데 그 당시 미군정에서 이렇게 초기협상을 해봐라, 이렇게 하게 되니까 제일 먼저 제주지사에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유해진 지사가 갑자기 회담하기로 한 날 몸이 아파서 못 가겠다고 해서 못 가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뽑힌 사람은 제주경비사령관 김정호였는데 갑자기 서울에 갈 일이 생겼다고 이 사람도 회담을 거부했습니다. 세 번째로 뽑힌 사람은 제주경찰감찰청장 최천이었는데 이 사람도 갑자기 회담 당일 날 아파서 가지 못하게 됐습니다.

    ▶ 김종배 : 왜 이래요?

    ▷ 서해성 : 모르죠. 네 번째로는 제주도 민족청년단장도 무슨 이유론가 만나는 걸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9연대장이, 김익렬이 유서를 써놓고 가서 김달삼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나가지고 여러 가지 합의들을 했는데요. 그 합의한 내용을 아주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회담이 끝나고 나면 72시간 내로 전투를 중지한다고 했고, 두 번째는 무장해제를 점차적으로 한다, 이렇게 했고 세 번째는 무장해제와 하산이 이루어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한다. 안 죽인다, 그 말이죠. 이렇게 합의를 하고 돌아왔죠. 그런데 그 합의를 원치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 김종배 : 누군데요?

    ▷ 서해성 : 이제 말씀드릴 텐데 바로 4월 28일 날 합의를 하고 왔는데 5월 1일 날 제주 중산간마을인 오라리를 어떤 사람들이 가서 습격합니다, 서북청년단들. 그리고는 이것을 자기들이 하지 않고 바로 무장대들이 마치 저지른 사건처럼 만들었고 미군정에서 비행기를 띄워서 공중촬영을 합니다. 그래서 이걸 영화로, 일종의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어가지고 제주도에 있는 빨갱이들이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 영상을 만들게 됩니다.

    ▶ 김종배 : 그러면 지금 미군정에서 사실은 협상을 할 의사가 없었던 거네요?

    ▷ 서해성 : 바로 그 얘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 사람한테 다 죽었기 때문에 물어볼 수는 없는데,

    ▶ 김종배 : 요즘으로 하면 헐리우드 액션이었구만.

    ▷ 서해성 : 그렇죠. 그러니까 서북청년단도 원치 않았고 경찰도 원치 않았고, 미군정도 원치 않았지 않았는가 하고 추측해볼 수 있는 근거가 바로 그 영상물을 제작한 걸로 짐작할 수 있겠죠.

    ▶ 김종배 : 미리 알지 않고서야 촬영할 수 없는 거니까,

    ▷ 서해성 : 그렇습니다.

    ▶ 김종배 : 그렇잖아요? 기획이 있었다는 얘기밖에 안 되는 건데, 그러면 그 뒤에 진압 또는 학살, 이게 본격화되는 겁니까?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대목이 진압현장을 누가 최종적으로 지휘했느냐 하는 문제지 않습니까?

    ▶ 김종배 : 그렇죠.

    ▷ 서해성 : 5월 5일 날 제주도에서 한국 남한에 대한 군정장관 윌리엄 딘이 제주도에 도착합니다. 그때 한국의 민정장관 안재홍, 경무부장 조병옥 그리고 제주도 민정장관이었던 맨스필드 중령, 이런 사람들 같이 모여서 회의를 합니다. 그날 이제 조병옥이라는 사람이 김익렬이가 회담을 하고 온 직후지 않습니까? 김익렬 연대장에게, 연대장을 비난합니다. 저 사람은 빨갱이다, 이렇게 얘기하고 그리고 또 하나는 저 사람 아버지가 빨갱이다, 이렇게 말한 거예요.

    ▶ 김종배 : 왜 부화뇌동을 하냐, 빨갱이하고?

    ▷ 서해성 : 아니요. 아버지가 빨갱이라고 얘기했어요. 그러니까 김익렬 연대장이 화가 나서 이제 멱살을 잡고 싸움이 시작됐습니다, 현장에서.

    ▶ 김종배 : 조병옥하고?

    ▷ 서해성 : 네. 그런데 왜 이 양반이 화를 냈냐면 자기 빨갱이라고 한 것까진 참겠는데 자기 아버지를 빨갱이라고 하는 건 참을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5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아버지가 빨갱이가 되느냐고, 갖다 붙인 건데 그렇게, 결국 그렇게 해서 김익렬은 용공분자가 되어가지고 여수14연대로 전출이 됐습니다. 사실상 바꾸려고 했던 거죠. 그리고 그다음 날 바로 온 사람이, 5월 6일 날 온 사람이 박진경 연대장이었습니다. 바로 이 사람 때부터 본격적으로 제주도에서 학살이 시작되는 거죠.

    ▶ 김종배 : 이 사람 어떤 사람인데요?

    ▷ 서해성 : 이 사람도 나중에 죽게 됐어요, 사실 이 양반도요. 제주도 자기 부하들이 이 양반을 죽이게 되는 건데 그 이유가 뭐냐면 이 양반이 자기 아버지가 대정익찬회 주요간부에요. 대정익찬회 친일단체입니다. 이 양반 자신이 그렇게 얘기를 했고 친일파 아들이라고 공공연하게 자랑을 하고 다녔다는 거죠. 그리고 수많은 사람을 제주도에서 죽이게 된 최초의 시작점이 이 양반이 본격적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당시 남로당 당원들이거나 남로당의 영향하에 있었던 사람들인데 손선호 하사라는 사람이 소총으로 두 발을 쏴가지고 이 사람을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 김종배 : 부하들이 죽였다는 거죠?

    ▷ 서해성 : 네.

    ▶ 김종배 : 그렇게 되는 거고요. 아무튼 그럼, 이게 초토화 작전이라고 불리지 않았어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초토화 작전이라는 게 바로 아까 말씀드렸던 박진경 이후 이제 토벌이 지속되는 거고요. 그다음에 아까 그렇게 죽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새로운 연대장이 오게 되는데 송요찬이라는 사람이 연대장으로 오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로 쭉 이어지면서 초토화 작전이 이어지게 되는데, 초토화라는 것이 개념이 뭐냐면 땅을 불태운다는 뜻이거든요.

    ▶ 김종배 : 풀 한 포기 안 남기고 싹 쓸어버린다는 뜻이잖아요.

    ▷ 서해성 :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나라에도 왔던 배 제너럴셔먼이라는 배가 있었지 않습니까? 바로 미 남북전쟁 때 장군, 셔먼 장군을 기린 배인데요. 초토화 작전을 처음 한 사람이죠.

    ▶ 김종배 : 그래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 김종배 : 초토화 작전이라는 걸 처음으로 고안한 게 셔먼입니까?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제주도에서는 그보다 더 잔인했죠, 사실은요. 초토화, 방화, 소개 작전으로 근거지를 완전히 없애는 섬광작전, 불태우고 죽이고 굶겨 없애는 삼진작전, 작전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색출을 명목으로 한 집, 한 집 샅샅이 쓸어버린 롤러작전, 작전의 명도 굉장히 많았고요. 이렇게 해서 결국은 중산간 지역 마을의 95% 이상이 파괴되었습니다. 95%요. 그리고 제주도 내 전체 400여개 마을이 있었는데 295개 마을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살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거죠.

    ▶ 김종배 : 400개 마을이었는데 295개의 마을이 사라지면 4분의 3이 사라졌다는 거잖아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가장 끔찍한 것들 몇 가지만 꼽으면 제주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 중에 하나는 무장대가 죽었으면 이렇게까지 억울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반 정도는 대살(代殺)로 죽었습니다.

    ▶ 김종배 : 대살?

    ▷ 서해성 : 그 사람을 찾으러 갔더니 없으니까 식구 중에 한 명을 대신 죽이는 겁니다.

    ▶ 김종배 : 그게 대살이에요?

    ▷ 서해성 : 네. 기가 막힌 일이죠. 그런데 이게 제주도에서만 있었던 게 아니라 나중에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 토벌할 때도 대살이 유행했습니다.

    ▶ 김종배 : 그랬군요.

    ▷ 서해성 : 미군정보고서에도 대살이 널리 있었다고 하는 그런 기록들이 많이 있고요.

    ▶ 김종배 : 그게 아녀자든, 어린아이든 가리지 않고,

    ▷ 서해성 : 상관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재판을 거치지 않고 죽었습니다. 재판을 받은 사람들은 정말 은혜를 입고 죽은 사람들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주도에서 군사재판을 받은 사람은 2,530명이고요. 그리고 일반재판을 받은 사람은 1,306명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얘기냐면 대략 한 3,500명 되지 않습니까? 죽은 사람 3만 명의 한 8분의 1 정도만이 재판을 받고 죽거나 갇혔고요. 대부분의 사람은 재판 없이 그냥 현장에 즉결처분되었던 거죠.

    ▶ 김종배 : 아까 역사적 연원을 잠깐 말씀해 주셨는데 같은 동포다, 같은 민족이다, 이런 개념자체도 별로 없이,

    ▷ 서해성 : 아니요. 이런 얘기를 솔직하게 말씀드려야 될 것 같습니다. 일본인은 한국인 이렇게 죽이지 않았습니다. 훨씬 더 잔인하게 죽였죠. 이민족도 이렇게 죽이지 않았는데 같은 동포인 사람들이 같은 동포를 이렇게 정말 잔인하게 했던 거죠.

    ▶ 김종배 : 그래서 아까 모두에 학살을 강조를 하셨던 게 바로 이런 역사적 사실 때문에 말씀을 하시는 거잖아요.

    ▷ 서해성 : 네. 집단학살이 정말 본격화된 것은 오늘 시간이 다 없어서 한 시간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별로 없어서 간략하게 말씀을 드리면 집단학살은 크게 두 시기에 있었습니다. 평소에도 사람을 죽이긴 했습니다만 9연대에서 2연대로, 9연대가 아까 일어났던 일종의 부대 내에서 부대장도 죽이고 그러니까 2연대로 교체가 되는데 2연대로 교체될 때 1차 대량학살이 일어납니다. 그때 왜 그랬냐면, 2연대는 뭐냐면요, 제주 여순사건이 났을 때 14연대를 진압을 했던 연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적이 굉장히 높았습니다. 그 당시 2연대는 대전 사령부가 있었고요. 그래서 9연대도 거기에 맞먹는 공전을 올리고 싶어서 수많은 사람들을 갖다가 죽였던 겁니다. 그래서 1차시기에 1차 대량학살이 있었고요. 2차 대량학살은 한국전쟁을 전후로 해서 보도연맹과 관련된 사람들,

    ▶ 김종배 : 잠깐만요, 작가님. 그런데 지금 어찌 보면 본론이 본격적으로 시작이 됐는데 지금 시간이 다 됐어요. 지금 한 시간을 이야기를 했는데 사실은 제가 볼 때 이걸 끝맺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지금 긴급 제안을 드리는데 본격적인 학살의 양상, 그다음에 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되는 의미, 이런 걸 다음 주로 기약을 하고 일단 오늘은 마무리를 해야 될 것 같아요.

    ▷ 서해성 : 네. 제가 오늘 일부러 방송에 부탁을 해가지고 한 시간을 방송하겠다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학살의 역사는 제주도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 김종배 : 바로 그 점, 다음 주에 그걸 한 번 같이 이야기했으면 좋겠는데,

    ▷ 서해성 : 그러기 때문에 제가 꼭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고요. 사실은 원래 계획대로 하면 다음 주에 베트남에서 한국인들이 베트남인들을 어떻게 많이 죽였는가, 그 얘기까지 하려고 그랬었는데요. 그것이 결국은 제주도에서의 많은 사람을 죽인 일, 이게 결국은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것이고요. 한국전쟁에서 소년시기를 보냈던 사람들이 베트남에 가서 베트남 사람들을 죽입니다. 베트남에서 영관급 장교들이 장군이 되어서 저지르는 것이 광주학살입니다. 학살의 역사를 끊어야 하기 때문에 사실 이 방송을 하고 있는 것인데 오늘 김종배 선생님 얘기하신 것처럼 다 마무리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이 정도에서 마무리를 짓는 것이,

    ▶ 김종배 : 다음 주로 이어가도록, 오늘 끝내는 게 아니라 다음 주로 계속 이어가도록 약속을 하고요. 오늘은 마무리해야 되는데 1354님이 이런 문자를 주셨어요.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정말 많은 공부와 관심을 필요로 하는 것 같습니다.’ 앞서 이 제주도의 어떤 역사, 아주 짧게 짚어봤는데 이걸 알고 있는 우리 국민이 얼마나 있는가, 바로 이 점을 제기를 해 주시는 문자였던 것 같은데요. 그렇죠.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만 정리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다음 주를 기약하면서 오늘 이야기는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서해성 작가와 함께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 서해성 :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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