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서해성의 박학다설] 잠들지 못하는 섬, 제주도(3) : ‘관광 총살’을 아시나요?

지혜롬

tbs3@naver.com

2018-04-20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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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성 작가
서해성 작가
  • 내용 인용시 tbs <색다른 시선, 김종배입니다>와의 인터뷰 내용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방송 : 2018. 4. 20. (금) 18:18~20:00 (FM 95.1)
    ● 진행 : 김종배 시사평론가
    ● 대담 : 서해성 작가



    [서해성의 박학다설] 잠들지 못하는 섬, 제주도(3) : ‘관광 총살’을 아시나요?


    ▶ 김종배 : 우리시대의 지식광대죠. 서해성 작가 모셨습니다. 어서 오세요.

    ▷ 서해성 : 안녕하셨습니까?

    ▶ 김종배 : ‘문영미, 전영미, 안영미’ 님이 “서해성 작가님 어서 오세요”라고 제 대신 지금 인사를,

    ▷ 서해성 : 반갑습니다.

    ▶ 김종배 : 지난주에 다 못 끝낸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주학살, 그렇죠? 이야기를 이어가봐야 될 것 같은데, 초토화 작전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결국은 거기서 끊긴 것 같습니다.

    ▷ 서해성 : 그랬었죠. 초토화라는 개념이 정말 땅을 불태운다, 남김없이 없앤다. 그런데 한국어하고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 말의 어원이.

    ▶ 김종배 : 어떻게요?

    ▷ 서해성 : 왜냐하면 바로 대동강에 들어왔던, 조선시대 때 바로 제너럴 셔먼호라고 하는 그 배가 이름이 붙은 게 제너럴(general) 뜻이 장군, 이런 말이지 않습니까? 바로 그 셔먼 장군이 미국에서 남북전쟁을 할 때 처음으로 만든 작전이 바로 초토화 작전입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남김없이 해서 그 당시에 남군을 바다 쪽으로 몰아냈다는 뜻입니다.

    ▶ 김종배 : 한 마디로 약간 싹 쓸어버린다.

    ▷ 서해성 : 그렇습니다. 단지 군인만 쓸어내는 것이 아니라 우선 민간인을 분리해내는 게 주목적입니다. 민간인을 완전히 분리해내고, 그리고 그 사람들 쓸 수 있는 식량, 통신수단, 우물 같은 걸 메우는 거죠. 그렇게 해서 그 사람들이 다시 후방 역량을 가질 수 없도록 한 상태에서 사지로 몰아넣는 것을 초토화 작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제주도에서 바로 그 작전, 초토화 작전을 구사했다는 겁니다.

    ▶ 김종배 : 그런데 초토화 작전은 전쟁 때 하는 거잖아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민간인을 상대로 해서 초토화 작전 같은 것은 사실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제주도에서 4.3이 학살인 이유에 중요한 부분이 되는 부분이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고요. 그리고 사실 무엇보다 한 마디로 줄여서 말해서 제주도에서 돌아가신 분들 중에 반 정도가 대략 한 1만 4천 명 가까운 1만 4천, 1만 5천 정도에 가까운 사람들이 어떻게 돌아가셨냐면요, 실은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죽었습니다.

    ▶ 김종배 : 지난주에 대살이라고 했던.

    ▷ 서해성 : 네. 대살이 바로 그것입니다.

    ▶ 김종배 : 대신 살해한다.

    ▷ 서해성 : 네. 가령 홍길동을 찾으러 갔으니까 없으니까 홍길동 가족을 다 죽이는 거죠. 그러니까 그 중에 남로당도 일했다, 맞습니다. 남로당도 조직적으로 움직이긴 했으나 그 전체의 규모에 비하면 남로당 조직은 미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4.3이 학살이었다는 걸 명백하게 입증하는 것이 바로 대살, 대신 죽이는 것. 그 당시에 젊은이들은 10대 후반에서부터 40대 후반까지는 다 도망가 있었습니다. 안 그러면 죽게 되니까요. 그러니까 그럴 때 그런 가족들을 죽였다는 것이죠. 그중에 정말 끔찍한 것 중에 하나는, 대살 중에 가장 끔찍한 것은 실은 ‘관광 총살’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 김종배 : 그건 또 뭐예요?

    ▷ 서해성 : 사람을 어느 마을 사람들을 다 죽이지 않고 일부를 죽이면서 나머지 사람들에게 죽이는 걸 보도록 하는 겁니다. 학살을 구경시키는 거죠. 그래서 저는 사실 제주 관광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저는 늘 관광총살이라는 말이 같이 떠올라서 그 제주 관광이라는 말을 제가 썩 좋아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역사를 아는 것 때문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들을 왜 그렇게 많이 잘 찾아서 했을까? 제가 지난주에 방송을 하면서 재판을 받고, 엉터리 재판이었지만 재판을 받고 죽은 사람들은 하늘의 복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제가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끔찍했으면 제가 그렇게 말을 했겠습니까? 하물며 그 ‘관광 총살’을 구경한 사람들이죠. 총살을 구경한 사람들도 그 뒤에 다시 이제 도망자 가족이라고 그래서 또 죽게 되는, 그런 것이 바로 4.3이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 김종배 : 그러니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재판을 거치지 않고 그냥 살해당한 거잖아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 김종배 : 산사람들, 무장상태는 어땠어요?

    ▷ 서해성 : 산사람들 무장상태, 주로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무장은 일본식 이른바 99식 소총을 갖고 있었습니다.

    ▶ 김종배 : 그건 어떤 거예요?

    ▷ 서해성 : 99식 소총이라는 게 이제 일본소총의 그전에 있었던 소총 무라타 소총이라고 합니다. 무라타 소총에 30, 23, 이런 연호가 붙는데 그건 메이지(明治) 집권기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 김종배 : 그렇게까지 거슬러 올라가요?

    ▷ 서해성 : 메이지가 집권했을 적에 그런 총들을 만들었다, 이거죠. 그 99식 장총이라는 것은 어떤 걸 얘기하는 거냐면 나중에 아리사카라고 하는 사람이 또 총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만든, 마지막 만든 일본 총, 그걸 아라사카 총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황기, 일본말로, 그때 하필이면 일본이 신화적인 연도가 끝자리가 99년도로 끝났습니다. 그러니까 그걸 가지고 이제 99식 장총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 김종배 : 그래서 99식?

    ▷ 서해성 : 네. 구식(舊式)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당시로서는 썩 괜찮은 총 중에 하나이죠. 한 번 당겨서 쏜다, 그래서 볼트액션, 볼트액션의 아시아에서 만든 대표적인 총기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주로 그런 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뛰어난 총이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아리사카 소총이라고 하는 것이. 그런데 우리 한국 군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건 카빈 소총들이었죠. 그러다 보니까 그러면 그 당시 산에 있는 사람들이 다 총을 가지고 있었느냐? 그렇지 않았습니다. 몇 가지 기록, 이게 미군이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국군의 기록을 그냥 살펴보면 어느 날 있었던 전투인데 <조선중앙일보>에 1949년 3월 20일자에 보도된 신문내용입니다. 사살 181명, 포로 195명, 그러니까 거의 한 400명 가까이 잡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소총은 3정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얘긴지 아시겠죠?

    ▶ 김종배 : 그러니까 포로가 195, 거의 200명 가까이 되는데 수거한 소총이 세 정이라고 한다면,

    ▷ 서해성 : 카빈 소총도 세 정 있고 합니다만 그렇다는 거죠. 그 뒤에 49년도 1월 6일 날 제2 연대 진압작전에 있었던 것 중에 하나는 적의 유기시체, 이게 군대가 기록한 기록입니다. 153구, M1 소총 1정, 탄약 500발, 일본도, 죽창,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 당시 입수했다고 하는 것이요. 사람이 153명이 죽었는데 총은 한 정이었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얘기입니까? 무장했다고 보기가 어려운 거죠. 그냥 민간인 150여 명이 있는데 그중에 총 든 사람이 1명 있었다, 그 말이거든요.

    ▶ 김종배 : 그러니까 학살이라고 하는 단어가 안 나올 수가 없는 거죠.

    ▷ 서해성 : 그렇죠. 물론 이중에 한 명이 총 들고 있었다는 게 좋은 일은 아니죠. 그런다고 해서 그 한 명을 잡기 위해서 152명을 죽였단 얘기지 않습니까? 정말 그런 식으로 무장 상태를 그렇게 비교하는 것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 김종배 : 알겠습니다. 이제 지난주에 이어서 지금까지도 제주에서 벌어졌던 학살 이야기를 쭉 나눠봤는데 이제 학살 일반으로 이야기가 넘어가야 될 것 같습니다.

    ▷ 서해성 : 아까도 말씀드렸는데 대살이 있었다는 말씀을 드렸고요. 또 하나는 ‘자수 학살’입니다.

    ▶ 김종배 : 자수 학살은 또 뭐예요?

    ▷ 서해성 : 과거에 시위에 참가한 적이 있다든지, 이를테면 쌀을 준 적이 있었다든지, 그런데 제주도에 3.1기념식 때 수만 명이 참가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사람이 여기에 해당됐습니다. 자수를 하라고 그러는 거예요. 우리가 명단을 다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 자수하라고 그러면 무서우니까 자수를 하는 거예요.

    ▶ 김종배 : 선처해 줄게, 자수해, 이렇게 되는 거죠.

    ▷ 서해성 : 그러고는 데리고 가서 죽였다는 겁니다. 또 하나는 ‘함정 토벌’이 있는데요, 함정학살. 무슨 얘기냐면 제2연대 3대대가 주로 이런 일을 했는데, 그 사람들이 산사람처럼 옷을 입고 다니는 겁니다. 그러고는 99식 장총을 메고 마을에 들어가서 ‘동무, 동무’ 하고 악수를 하는 돌아다니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눈치를 챘어요. 그래가지고 공산당이면 나가서 싸우겠다, 이렇게 말했단 말이죠, 동네사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을 산사람들도 내통한 걸로 간주해가지고 또 데려가서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정부 군대가 자기 국민을 향해서 마치 빨치산처럼 옷을 갈아입고서 동네에 들어가서 그 사람들을 유인해낸 다음에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갖다 죽였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 김종배 : 이 정도면 우리가 흔히 아는 ‘묻지마 학살’ 아니에요, 거의?

    ▷ 서해성 : 저는 ‘묻지마 학살’보다 더 잔인하다고 생각합니다. 묻지마 학살은 차라리 그냥 죽는 거예요. 왜 이런 고통을 먼저 선행시킵니까? 제주도 말에 ‘곰도 무섭고 호랑이도 무섭다’, 이 말이 있습니다. 무슨 얘기냐면 곰은 경찰을 얘기하는 거고 호랑이는 산사람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낮에는 경찰이 무섭고 밤에는 산사람이 무서운데, 왜 낮에 그렇게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산사람 복장을 하고 들어가 가지고 ‘동무, 동무’ 악수하고 일부러 그렇게 하고 나서 ‘너 빨갱이다, 여기에 대해서 호응했으니까‘. 아니, 그러면 그렇게 총 들고 사람 죽이는데 그러면 호응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일을 왜 우리 군인이 해야 되냐는 거죠.

    ▶ 김종배 : 지금 우리 군인이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진압부대 얘기를 해 주세요.

    ▷ 서해성 : 진압부대가 48년 12월말쯤에 9연대에서 2연대로 교체가 됩니다. 9연대라는 우리나라 국군 9연대는 서귀포에서 만들어진 부대입니다.

    ▶ 김종배 : 그래요?

    ▷ 서해성 : 부대자체가, 2연대는 대전에 있었던 부대입니다. 그런데 이 2연대가 이제 여순사건을 진압하는 부대입니다. 이해가시죠, 무슨 얘기인지? 14연대를 진압했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부대 이름까지 아실 필요는 없겠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께서. 그런데 하여튼 그랬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 당시 정부에서는 9연대를 별로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 김종배 : 그러니까 이게 저는 지금 이 말씀 듣다보니까 광주항쟁이 자꾸 떠오르는데,

    ▷ 서해성 : 맞습니다.

    ▶ 김종배 : 향토사단 있었고,

    ▷ 서해성 : 맞습니다. 그거하고 똑같습니다.

    ▶ 김종배 : 광주에 경찰이 있었는데 미온적이라는 이유로 뒤로 물려버리고 공수부대 투입했던 거죠.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거하고 똑같습니다.

    ▶ 김종배 : 똑같네.

    ▷ 서해성 : 그런데 이게 조금 더 잔인했던 게 9연대가 그렇게 정부가 믿지 않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떠나기 전에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겁니다.

    ▶ 김종배 : 그래요?

    ▷ 서해성 : 실적을 올리기 위해서, 이게 참 제가 웃어서는 안 되는 방송인데,

    ▶ 김종배 : 실적이라,

    ▷ 서해성 :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제가 이렇게.. 하여튼 2연대가 오게 되는데 2연대에 서북청년단들이 많이 가담하게 되는 겁니다, 정규적으로. 그래서 물론 9연대도 있었습니다만 2연대에 엘리트 컴퍼니라고 이름을 특별히 붙여줬습니다. 서북청년단 있는 그 중대를, 특별중대,

    ▶ 김종배 : 엘리트 컴퍼니?

    ▷ 서해성 : 특별우수중대라는 거죠. 그래서 그 사람들 거기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군인들도 취조할 수 있는, 헌병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잔인한 일들을 많이 수행한 그런 부대로 생각하시면 자연스럽게 맞을 것 같습니다. 그때 이제 이 사람들이 정부에서는 군부대에 현역으로 6,500명 정도의 서북청년단원들을 집어넣었고요. 경찰에 1,700명을 공급한다는 그런 계획 하에 서북청년단들이 여기에 가담을 해서 일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분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혹하게 아까 했던 그런 일들을 주도하는 일을 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 김종배 : 그러면서 작전변화가 있었던 거죠? 연대를 교체하면서?

    ▷ 서해성 : 네. 연대를 교체하면서 훨씬 더 잔인한 토벌작전이 있었던 거고요. 서북청년단은 그냥 말씀을 드리면 2연대가 오기 전에는 그냥 개별적 활동 내지는 사병적 성격이 강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는데, 2연대가 올 때 정규군에 편입되었다는 점이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서북청년단 자체가 정규군이 되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 김종배 : 그러면서 이제 아까 대살부터 시작을 해서 별별 학살의 방법을 다 말씀을 해 주신 거잖아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런데 2연대가 왜 이렇게 공세를 강화하게 되냐면요, 아직 2연대가 제주도 지리 상황을 잘 모르지 않습니까?

    ▶ 김종배 : 외지에서 왔으니까,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산에 있는 산사람, 빨치산들이죠. 빨치산들이 이제 49년 1월 12일 날 이제 이 부대를 공격을 가하는 것입니다. 공격을 가하게 되니까, 물론 이제 산에 있는 사람들이 51명이나 죽고, 훨씬 더 많이 죽었습니다, 2시간 접전 끝에. 그런데 그때부터 사태를 완전히 전환해가지고 토벌작전으로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참가했던 제주도의 한라산에 있었던 무장대원들이 대략 한 200여명 정도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날 51명이 현장에서 사망했고, 그렇긴 했습니다만 이게 사실상 마지막 무장 항쟁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무장 세력은 사실상 소멸하게 되는, 전투 끝에 소멸하게 되는..

    ▶ 김종배 : 50몇 년까지 갔다고 했잖아요?

    ▷ 서해성 : 실제로는 50몇 년까지 갔습니다만, 진압은 계속 됐습니다만 실질적으로 무장세력은 이날 사실상 의귀리전투라고 그러는데, 의귀리전투에서 궤멸되었다.

    ▶ 김종배 : 그러면 그 이후부터 몇 년 동안 일방적인 진압, 색출, 학살,

    ▷ 서해성 : 그것이 진행된 거죠.

    ▶ 김종배 : 일방적으로 진행된 거네?

    ▷ 서해성 : 그 뒤에 가장 끔찍한 것은 50년이죠. 50년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보도연맹이라는 거죠. 보도연맹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 별로 관계없는 사람들, 제주도 사람들 중에서 한국전쟁을 전후로 해서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 한 3만여 명 정도, 이렇게 보도연명에 가입을 시켰고요. 그리고 또 5만 명 정도를 의심스러운 사람들이라고 당시 분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의심받는 사람들이었는지 충분히 이해가지 않습니까? 그렇게까지 의심받고 산다는 건 끔찍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김종배 : 아까 지난주에도 잠깐 언급을 하셨고 아까도 언급을 하셨는데 ‘제주도에 관광을 갈 때마다’ 이런 말씀을 하셨잖아요. 많은 분들이 제주도에 관광을 가십니다. 가지 말라고 할 이유가 없죠. 가야죠. 다만 알고 가자, 이것 아니겠습니까?

    ▷ 서해성 : 네. 제주도는 한국에서 아열대 기후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그리고 화산이 있어가지고 제주도가 갖고 있는 고유한 지형적 특성, 그리고 바닷물도 깨끗하고 그곳에 가는 것 자체를 나무란다는 건 정말 잘못된 일이죠.

    ▶ 김종배 : 그러니까 바로 가서 우리가 우연히 어디를 들렀을 때 이곳이 바로 4.3의 역사의 현장이다, 이건 알면 좋잖아요.

    ▷ 서해성 : 그렇죠. 기왕이면 아는 게 좋죠. 왜 그러냐? 사실 고통스러운 역사를 반복해서 여러분들 괴롭힌다, 이런 얘기가 아니고요. 그래야 이런 일이 반복 안 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죠. 그런데 정말 끔찍하게도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곳 중에 하나가 제주비행장입니다.

    ▶ 김종배 : 지금의 비행장? 제주공항?

    ▷ 서해성 : 그렇습니다.

    ▶ 김종배 : 그래요? 당시에도,

    ▷ 서해성 : 제주공항이었습니다. 제주공항이 확장된 거죠, 지금은요.

    ▶ 김종배 : 왜 거기서 이렇게 많이 죽었어요?

    ▷ 서해성 : 바로 비행기장, 넓으니까 그쪽으로 사람들 끌고 와서 트럭에 싣고 와서 어쩔 때는 500명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 김종배 : 한 줄에 세워놓고?

    ▷ 서해성 : 네. 제주공항에 내리시거든 마음속으로 한 번쯤 1초간 혹은 2초간 묵념 한 번 올려주시는 것도 좋겠다. 그래서 다시는 그런 일이 안 생기게끔 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 김종배 : 관광을 가면 모든 분들이 거쳐야만 되는 곳이죠, 공항은.

    ▷ 서해성 : 그렇죠. 그리고 폭포가 있는 천지연 주차장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폭포에 집어던졌다, 이런 기록도 있습니다. 그 얘기는 그만하겠습니다. 너븐숭이 학살, 너븐숭이라는 말이 제주도말로는 넓은 바위, 그런 뜻인데요. 너븐숭이에서는 그곳에 있는 북촌마을인데요. 함덕에 있는 북촌마을인데 그곳에 군인 두 명이 무장대의 공격에 의해서 죽었어요. 그러자 그 동네에 있는 마을을 다 불태웠고 그리고 그 동네 사람들을 남김없이 그날 저녁까지 해서 다 죽이는, 그중에 하나가 한 아이가 어머니가 총에 맞아 돌아가셨는데 그 아이가 어머니 죽은 지 모르고 차가운 젖을 빨고 있었다는 그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 김종배 : 광주항쟁 하면 꼬마가 아버지의 영정사진인가요? 그걸 들고 있는 사진이 지금도 뇌리에 선한데,

    ▷ 서해성 : 바로 그런 것하고 정말 유사한 거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고요. 그래서 그 동네는 무남촌이라고 오랫동안 불렀습니다. 남자가 아무도 없으니까요.

    ▶ 김종배 : 그래서 무남촌?

    ▷ 서해성 : 네. 그리고 제주도엔 비행장이 당시 두 개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이게 제주공항이고, 또 하나가 제주공항에 있는 그곳을 부르는 제주도말은 알뜨르라고 합니다.

    ▶ 김종배 : 알뜨르?

    ▷ 서해성 : 뜨르라는 말은 제주도말로 들판을 얘기합니다. 또 정뜨르라는 곳에 비행장이 있었습니다. 바로 지금 우리 강정 근처에 머지않은 곳인데요. 그 정뜨르가 바로 일본군들이 남경을 공격할 적에 이용했던 경유지 비행장이기도 합니다.

    ▶ 김종배 : 그래요?

    ▷ 서해성 : 그렇습니다. 지금도 격납고 수십 개 남아있습니다. 정뜨르 옆에 비행장을 관리하다보니까 거기에 탄약고가 있는데 그 탄약고에 큰 두 개의 탄약고가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탄약고가 폭발 때문에 지하에 주로 만들거든요, 땅을 파서요. 그곳에 사람들을 집어넣고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예비 검속자들, 그러니까 뭡니까. 보도연맹 사람들을 많이 죽였는데 한꺼번에 사람들이 죽었다고 그래서 후손들이 그 무덤의 이름을 붙이기를 ‘백조일손지묘’다. 조상은 백 명인데 왜냐하면 아무도 시신을 찾을 수 없는 거예요. 다 섞여있기 때문에, 그래서 ‘손(孫)은 하나다’라는 그런 것인데.. 그걸 어떻게 찾게 되었냐면 이분들이 죽게 될 줄 알면서 차를 타고 트럭에 실려 가면서 신발을 벗어던지고, 옷가지를 벗어던지고, 그래서 나중에 유족들이 그 옷과, 마치 이게 동화책 한스와 그레텔에 나오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빵조각을 버려놨다가 다시 돌아가는 것 같은, 그런 기가 막힌 이야기, 그건 동화인데 이건 실제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가면 탄약고에, 그 섯알오름 탄약고라고 하는데 그 탄약고에 가면 늘 물이 고여 있습니다. 깊으니까요. 마치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처럼 지금도 그렇게 보이는 그런 자리입니다. 혹시 그쪽으로 가시거든 그쪽에 한 번, 요새는 또 이렇게 백조일손지묘 섯알오름 학살터라고 그래서 안내문도 붙어있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같이 가서 보시면, 한 번 들러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 김종배 : 그런데요, 지금 2연대, 9연대 말씀하셨고 서북청년단, 서청 이야기하고 하셨는데 그 일원 중에는 아파하고 도저히 그 학살에 함께 하지 못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갖고 있는 사람도 있었어야 되는 거잖아요.

    ▷ 서해성 : 있었습니다.

    ▶ 김종배 : 있었을 것 아닙니까?

    ▷ 서해성 : 네. 한국인은 그렇게 다 나쁜 사람만은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저는 이분들을.. 동상을 저는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동상을, 정말 이런 분들을 교과서 같은 데에 실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첫 번째 정말 뺄 수 없는 분은 초기 9연대장이었던 김익렬 장군입니다. 김익렬 장군은 어떻게 해서든지 학살을 줄여보려고 하다가 쫓겨났습니다. 그분도 중요한 분이고, 또 하나는 서귀포 남원면 신흥리 구장이신 김성홍 구장, 이 양반은 군경들이 누가 이 집에 입산했냐? 도망했냐? 그러면 무조건 모른다고 해서 이 양반 별명이 ‘몰라 구장’입니다. 그래서 그 동네 사람들 안 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위미리 출신 순경 강계봉이라는 분인데 이분도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을 안 죽이려고, 경찰인데 애를 썼던 사람이고요. 서북청년단원 중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서북청년단원 중에 고희준이라는 분은 성산포 지역에 있는 무고한 주민들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애를 썼던 사람입니다. 경찰 장성순이라는 분도 자수한 사람들, 그 사람들 죽이라고 그랬는데 죽이지 않고 풀어줬습니다. 그런 분이 있고, 또 한 분은 이북출신인데 이분도 방 경사, 이름이 전하지 않습니다. 방 경사는...

    ▶ 김종배 : 성만 방씨.

    ▷ 서해성 : 네. 방 경사, 성만 전하는데 총으로 사람을 쏴죽이라고 그런 거예요. 갑자기 자기 총기 고장 났다고 그런 거예요. 묻고 싶습니다. 그때 당신 총은 왜 그때 고장 났냐고, 정말 감동적인 순간이거든요, 제가 볼 때는요.

    ▶ 김종배 : 그러니까요.

    ▷ 서해성 : 총이 고장 나서 못 죽인다, 이렇게 말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훌륭하신 분 아직 소개 안 했습니다.

    ▶ 김종배 : 누군데요?

    ▷ 서해성 : 문형순이라는 분입니다. 이분은 경찰입니다. 경찰인데 이제 국민 보도연맹의 예비 검속자들을 수백 명을 죽이라고 명령이 이미 내려와 있었습니다. 계엄사령부에서,

    ▶ 김종배 : 제주출신은 아니죠?

    ▷ 서해성 : 제주출신 아닙니다. 이 양반은 평안남도 안주출신인데 그런데 이분이 학살명령이 내려왔는데 그 학살명령을 거부합니다. 그리고는 그 문서에 써놨습니다. 나는 부당하므로 불이행한다.

    ▶ 김종배 : 정면으로 맞섰네요?

    ▷ 서해성 : 네.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수백 명의 학살을 막은 사람입니다. 이분은 정말 훌륭하신 분이죠. 이분이 결혼도 하지 않으셨고 나중에는 그리고는 쌀 배급소에서 쌀을 나눠주다가, 극장에서는 매표원을 하시다가 후손 없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어디 출신이냐면 이 양반이 독립군 출신입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역사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 김종배 : 지난주에 제주의 역사를 짧게 짚으면서 민족DNA 이야기를 한 적 있지 않습니까?

    ▷ 서해성 : 네. 부족하다 그랬는데,

    ▶ 김종배 : 지금 광복군 말씀하시니까 확 정리가 되네.

    ▷ 서해성 : 그 말입니다. 이분이 왜, 이분 일가친척 하나 없는 분이에요, 제주도에요. 그런데 이분은 사람을 죽이는 것을 거부한 거예요. 왜 그랬겠습니까? 이 양반 민족주의자거든요. 그 명령을 거부한 거예요.

    ▶ 김종배 : 그런데 이런 분들의 역사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 서해성 : 네. 제주평화공원에 이분의 사진도 기록이 되어 있고 한 장 남아있습니다. 있긴 한데 그보다는 훨씬 더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 김종배 : 그런데 정반대로 2945님이 지금 문자 주셨는데 그때의 가해자들 있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찾아서 명단 공개해야 한다고 봅니다’라고 의견 주셨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 서해성 : 제일 큰 가해자는 그 당시 윌리엄 딘이죠. 딘 장군, 당시 군정장관이었고요. 제주도 와서 직접 이런 전투명령을 지위했죠. 그러다 나중에 미국으로 건너갔거든요. 그러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미국 24사단장으로 다시 한국에 왔습니다. 그랬다가 인민군에게 체포되어서 포로생활 2년을 했죠.

    ▶ 김종배 : 그랬어요?

    ▷ 서해성 : 유명한 딘 장군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양반부터 포함해서 당시 제주도 군정장관은 맨스필드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상층이었고, 우리 초대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도 자유롭지 못하고요. 조병옥, 이런 사람들도 거기 자유롭지 못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있죠, 사실은요.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산사람들 토벌한 것에 이의를 다는 건 추호도 없습니다. 아까 전 말씀드렸지만 어떻게 해서 대살을 합니까? 어떻게 해서 ‘관광 총살’을 합니까? 이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걸 학살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사람들은 정말 그래서는 안 되는 겁니다.

    ▶ 김종배 : 유튜브 라이브로 김정원 씨가 ‘4.3사건 우리 아이들도 알 수 있게 교과서에 비중 있게 넣어야 될 것 같아요’라는 의견을 주셨고요.

    ▷ 서해성 : 특히 제가 꼭 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겁니다. 의인들, 이렇게 그때 학살을 저지하려고 자기 인생을 걸었던, 그 당시 학살 거부하면요, 그 사람 죽을 수 있었습니다.

    ▶ 김종배 : 우리가 지금 들을 때는 어찌 보면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 될 도리를 한 것 같지만 그때는 목숨 내놓고 하는 거잖아요.

    ▷ 서해성 : 목숨 내놓은 겁니다. 제가 그 말입니다. 이런 분들에 대해서 사회가 기록하고 이런 분들 상도 만들었으면 좋겠고 내부고발자보다 훨씬 더 이 양반들 센 사람이거든요. 실제로 목숨이 끊어질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고,

    ▶ 김종배 : 말 그대로 목숨 걸고 저항한 분들, 한 마디로,

    ▷ 서해성 :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양반이 아까 말씀드렸던 불이행한다고 하는 그게, 그 문서가 지금 남아있습니다.

    ▶ 김종배 : 이런 건 보관해야 돼요.

    ▷ 서해성 : 이게 인권, 휴머니티, 인권 개념에서는 이런 게 사실은 국보급인거죠.

    ▶ 김종배 : 그렇죠. 꼭 보관해야 돼요. 또 시간이 다 됐는데 이제 마무리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 서해성 : 그렇게 하겠습니다. 당시는 4.3학살은 미군정체제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친일경찰, 친일군인, 서북청년회, 이런 사람들이 저지른 일인데요. 이건 인간성의 한계를 넘는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야수보다 못한 일했다, 이런 말하면 안 됩니다. 야수는 이런 일 안 합니다. 그 거대한 죽음과 죽음 사이에 정말 인간으로서는 수용할 수 없는 역륜, 윤리를 거스르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건 기록해야 합니다. 교과서 같은 데에 기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다시 이런 일이 안 생기기 때문입니다. 단지 광기라고 이렇게 설명해서는 저는 그런 말을 거부합니다. 그러니까 제주도 4.3이 뭐냐? 아직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죽는 죽음이 있고 죽지 못하는 죽음이 있습니다. 제주도 4.3은 아직 죽지 못한 죽음입니다. 문재인 대통령께서 그나마 조금 위로되는 그런 말씀을 해 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학살은 학살을 잊어버리면 학살은 다시 학살을 오마주합니다. 그러니까 그걸 끊어내기 위해서라도 학살이라는 것은 이렇게 한 줄로 줄여서 말할 수 있습니다. 학살은 죽음을 숭배하는 가장 반종교적인 종교행위입니다. 그렇게 끊어내기 위해서라도 4.3학살의 역사기록을 사람들이 꼭 알아야만 되겠다. 사실 4.3학살에 대한 것들이 왜 제주도에만 그 기념관이 있어야 되는지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서울 어디엔가도 있어서 이런 일이 다시는 안 생기는 그런 거울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 김종배 : 7109님도 바로 그런 의견의 문자를 주셨는데, 아픈 역사를 기억해야 다시 반복되지 않으리라 봅니다. 널리 알리고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의견을 주셨는데 100% 공감을 하면서 박학다설 마무리하겠습니다. 서해성 작가와 함께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 서해성 :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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