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광주를 기억하는 외국인들 "제자 죽인 전두환 용서할 수 없어"

정혜련

hchung02@seoul.go.kr

2020-05-18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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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앵커멘트 】
    1970년대부터 80년대 초반까지 한국 독재정권의 실상을 외국에 알리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언론도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던 5.18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힘쓴 세 명의 평화봉사단원을 정혜련 기자가 만나봤습니다.

    【 기자 】
    【 INT 】도널드 베이커 /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 아시아학과 교수

    "5월 27일 아침에 (광주에) 도착했습니다. 거리에는 쓰레기가 많았고 핏자국들이 있었죠. 사람들이 고압호스로 거리를 청소하고 있었어요. 저는 사람들의 눈을 봤죠. 절대 잊을 수가 없어요."

    1971년부터 1974년 광주에서 미국 청년봉사단체인 평화봉사단으로 활동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던 도널드 베이커씨는 제자를 죽인 전두환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 INT 】도널드 베이커 /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 아시아학과 교수

    "죽은 사람들을 향해 울부짖는 사람들, 그리고 신원 미상의 시체들이 있는 체육관 밖에서 기다리는 할머니들을 기억합니다. 이 할머니들은 그들 손자의 시체를 찾기 위해 한 명씩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죠."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 머물렀던 또 다른 외국인 폴 코트라이트씨는 광주에서 외신 기자 인터뷰를 도왔습니다.

    【 INT 】폴 코트라이트/ 당시 미국 평화봉사단원

    "외신 기자들과 일할 때 광주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역 하면서 (5.18 헬기 사격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는 것이 더 분명해졌습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고통받았다는 점에서 저에게는 아주 힘든 시기였습니다."

    계엄군의 잔악 행위를 목격하고, 다른 단원 3명과 함께 부상자 이송과 시신 수습을 도왔던 코트라이트씨,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5.18에 관한 회고록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 INT 】폴 코트라이트/ 당시 미국 평화봉사단원

    "우리는 1980년대로 돌아가 사건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어느 누구도 왜곡할 수 없습니다."

    5.18을 다룬 최초의 외국소설을 쓴 윌리엄 에이모스씨는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민주주의를 향한 느리고 고통스러운 무수한 영웅들의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 INT 】윌리엄 에이모스/ 당시 미국 평화봉사단원

    "(오늘날 한국의 민주주의는) 동아시아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민주주의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는 광주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과 살아남은 사람들의 헌신으로 이룩한 것입니다. 세상은 그들의 죽음을 슬퍼해야 하고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습니다."

    【 INT 】도널드 베이커 /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 아시아학과 교수

    "한국은 국민들이 진정으로 민주주의를 원할 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한국인들은 광주에서 이룩한 민주주의에 대해 자랑스러워해야 합니다."

    40년이 흐른 지금, 5.18은 함께 기억해야 할 민주주의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TBS 정혜련 입니다.

    <인터뷰 전문>

    도널드 베이커

    평화 봉사단에서 근무할 당시 광주의 모습은 어떠했나요?

    도널드 베이커: 제가 평화봉사단 봉사자로 일했을 당시 광주는 지금 보다 훨씬 작았죠. 크기 면에서는 1/3정도였고 인구는 5만 명 정도였죠. 물론 서울만큼 발달되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일반적인 한국 하숙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샤워나 목욕을 하기 위해서는 공중목욕탕을 갔어야 했죠. 제가 머물던 방도 너무 작아도 두 팔을 벌리면 양쪽 벽이 닿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좋았어요. 좋은 시간을 보냈죠. 물론 처음에는 힘들었어요. 광주 사람들은 서양 사람이 시내에 살고 있다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어요. 외곽에 미국 공군 기지가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저를 군인이라고 생각했죠. 한국말을 배우고 한국인 가족과 함께 살며 한국 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친구들이 많아지기 시작했죠. 그리고 저는 광주 음식을 좋아했습니다. 광주 음식은 정말 맛있었어요. 저는 아직도 광주를 제 2고향이라 부릅니다.

    봉사단에 자원 봉사자로 일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도널드 베이커: 저는 학부생으로서 중국어를 공부하고 있었고 공부를 지속하기 위해 아시아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어요. 대만에는 평화 봉사단이 없었고 미국 시민으로서 중국에는 갈 수가 없었죠. 그 때 평화 봉사단이 “한국은 어때?”라고 물었고 저는 “중국과는 많이 다른가요?”라고 물었죠. 처음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꽤 당황스러웠죠. 그 뒤 저는 한국을 사랑하게 되었고 지금은 한국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한국에 살았고 한국의 역사적인 순간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전두환과 그의 정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도널드 베이커: 그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어요. 저는 무엇보다도 민주주의를 믿습니다. 전두환은 아주 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한 사람이었죠. 그리고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는 민주주의에 대해 느리게 행동했죠. 그리고 그는 아직도 그가 잘못됐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놀랄만한 일이죠. 아직도 너무 오만해요. 역사가 그가 잘못했다고 말하고 있음에도 그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교수로서 교실에서 가르칠 때는 객관적이어야 하는데 그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 저에게는 힘든 일입니다. 전두환에 대해 이성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어려워요. 제가 가르쳤던 학생들 중 일부가 그에 의해 희생되었습니다. 광주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거기서 저는 3년 동안 학생을 가르쳤죠. 1971년에서 1974년까지 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내 학생들을 죽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1980년 광주에서 당신이 보고, 듣고 느꼈던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요?

    도널드 베이커: 처음 광주에 도착했을 때, 광주는 군사 통제 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부를 돌아다니다 다시 올라가야 했죠. 광주에 접근할 때 시외버스에 타고 있었고 서울에서 내려오는 나주 교차로, 시골과 광주 사이에 있는 세 방향 교차로를 지났어요. 길가에는 승객을 태운 석 대의 버스가 있었고 거기에는 많은 총알구멍 흔적이 있었죠. 시체는 보지 못했지만 그 버스들은 봤습니다. 버스는 서지 않았죠. 대신 광주 근처에서 저를 내려줬고 광주까지 산을 넘어 가야 했죠. 광주에 있던 시위자들 중 일부는 그 버스에 올라 광주시 너머에서 시위를 하기 위해 도시를 떠나려고 하는 도중 군대의 공격을 받은 거죠.

    1980년의 5월 폭력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본 것이 있고 그것에 대해 충격을 받았죠. 광주 시내로 갔을 때 군대가 모든 주요 도로를 막고 있었어요. 그래서 버스가 외곽에서 우리를 내려줬죠. 저는 할머니들을 따라 갔어요. 광주는 10일 동안 봉쇄되었고 음식도 없었죠. 사람들은 산을 통해 쌀을 나르고 있었어요. 군이 등산로는 막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그 길을 통해 광주로 걸어갔어요. 군이 도시를 되찾은 직후 저는 그곳에 도착했죠. 5월 27일 아침에 도착했습니다. 거리에는 쓰레기가 많았고 핏자국들이 있었죠. 사람들이 고압호스로 거리를 청소하고 있었어요. 저는 사람들의 눈을 봤죠. 절대 잊을 수가 없어요. 충격에 휩싸인 눈들을요. 죽은 사람들을 향해 울부짖는 사람들, 그리고 신원 미상의 시체들이 있는 체육관 밖에서 기다리는 할머니들을요. 이 할머니들은 그들 손자의 시체를 찾기 위해 한 명씩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죠. 절대 잊을 수가 없어요. 예전에 같이 살던 가족들을 만났어요. 그들은 괜찮았죠. 집주인 아주머니는 제가 한국에 있을 때 두 번째 어머니와 같았어요. 지방 청사 뒤쪽에 있던 그녀의 집에서 그녀는 사람들이 총에 맞으면서 비명을 지르는 소리를 들었죠. 그녀뿐만 아니라 아직도 제가 어린 동생이라 부르는 그녀의 조카는 충격에 휩싸였었죠. 저는 아직 그 조카를 만나고 있는데 그는 그 당시 의대생이었어요. 그는 그가 목격한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아주 힘들어해요. 그 기억은 아직도 그에게는 상처에요. 광주에서 돌아와 서울에서 사람들에게 제가 목격한 것을 이야기했을 때 이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죠.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 입을 다물어야 했고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980년 6월, 교수님은 서울 시내버스에서 한 남자가 “전라도 사람들은 다 죽어야 한다”고 외치는 것을 목격했다고 들었습니다.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아직도 한국 사회에서 지역적 차별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도널드 베이커: 1980년 그러한 모욕적인 말을 들었을 때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1972년 초 저는 광주에서 1년 동안 살았어요. 그 당시 친구를 만나기 위해 부산으로 갔고 쇼핑을 하기 위해 시장에 갔죠. 그 때 저는 광주 액센트로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가게 주인이 어디서 그렇게 말하는 것을 배웠냐고 물었죠. 저는 광주에서 살고 있다고 대답했고 거기는 도둑이 많으니 조심하라고 했죠. 저는 광주 사람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다 이야기 했어요. 그러자 그분은 조용해졌어요. 하지만 화가 났죠.

    광주가 공격 받고 있을 시기에 쓴 시, 광주 고등학교 선생님이 집필한 거리의 시체에 대해 쓴 시인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가져갔다는 것입니다. 저는 미군부대에 그 시 복사본을 가져갔고 서울로 가는 버스 좌석에 그 시를 두었죠. 그리고 그 남자가 그 자리에 앉았는데 제가 그 시를 놔둔 것을 몰랐어요. 그는 시를 읽은 뒤 친구에게 “전라남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어야 한다”고 했죠. 저는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아 그 남자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입을 닫아버렸어요. 이것이 저와 제 아내가 한국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된 또 다른 이유입니다.

    1980년 5월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을 바로 잡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말하는 5.18운동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누가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는지, 800여 명의 실종된 사람의 시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이들의 시체는 바다에 묻혔을 수도 있죠. 진실을 밝혀야 할 필요가 있고 어쩌면 진실이 밝혀졌을 때 한국의 나머지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가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는 것은 목숨을 바친 광주사람들 덕분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두환 부대에 대항한 것은 오직 광주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 외에는 아무도 저항하지 않았죠. 그들은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더 충격적이었죠. 광주 사람들은 검열 때문에 다른 지역 사람들이 이러한 일을 몰랐다는 것을 알 수 없었어요. 그래서 다른 지역 사람들도 같이 일어나 민주주의를 요구하기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광주 사람들에게는 힘든 일이었죠. 따라서 그 일을 되돌아보고 사람들은 광주지역에서 희생된 사람들에게 고마워해야 합니다.

    회고록을 통해 5·18 당시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모욕한 혐의로 전두환씨는 재판에 넘겨진 상황입니다.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도널드 베이커: 그의 전기를 읽었고 그는 매우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군대가 광주 시내에서 사람들에게 총격을 가했을 당시에 대해 사람들이 모르는 것은 총격이 있기 전 고 조비오 신부를 선두로 10명의 신부가 시내로 갔고 폭력을 중단시키기 위해 군중과 군대 사이에 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군대는 신부들에게 계속 있으면 그들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다고 했고 신부들은 기다리기로 했죠. 헬리콥터에서 사격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고 조비오 신부는 폭력을 중단시키기 위해 시내로 향했습니다. 헬리콥터 총격에 대해 아는 사람이 고 조비오 신부만은 아니었습니다. 미국인들도 헬리콥터가 사람들 위로 비행하는 것을 보았죠. 제가 광주에 갔을 때 사람들은 헬리콥터만 보면 몸을 자동으로 몸을 움츠렸죠. 헬리콥터가 실제로 총격을 가했고 고 조비오 신부는 용감하게 이에 대해 말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1980년대 중반 고 조비오 신부는 몇 년 동안 감옥에서 지냈죠. 전두환은 명예훼손으로 유죄판결을 받아야 합니다. 저는 전두환 전기 사본을 가지고 왔어요. 그의 모든 거짓말을 보고 싶었죠. 아직도 제 책장에 있습니다.

    5.18광주 민주화 운동을 부정하거나 왜곡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도널드 베이커: 민주주의를 믿는다면 광주 사태가 있기 전 전두환이 했던 일을 어떻게 지지할 수 있나요? 그는 정부를 통제하기 위해 군대를 사용했고 국회를 해산시켰어요.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죠. 민주주의를 믿는다면 광주 사람들을 지지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그 곳에 북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하는 미친 사람들이 있죠. 저는 그 당시 북한 사람들의 억양을 듣지도 못했고 북한 사람들의 시체는 어디에 있나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었고 신원이 확인되었습니다. 일부는 군인들이었고 대부분은 광주 사람들이었습니다. 북한 사람들의 시체는 어디에 있나요 그럼? 정부가 이들을 발견했다면 아마 만들어진 것일 것겁니다. 북한 사람들은 전혀 없었어요. 사실만 보세요. 꾸며내지 말고. 당신이 하지 않았던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광주 사람들을 모욕하지 마세요. 이것이 제가 그들에게 하고 싶은 말입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상처 받은 사람들에게 한 말씀 하신다면요?

    도널드 베이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상처로 고통 받고 있죠. 그들의 고통을 잘 알고 있고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한국은 결국 민주주의 국가로 되었습니다. 하지만 광주사태가 민주주의로 가는 과정을 더 가속화시켰죠. 한국의 나머지 지역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해 알기까지 시간이 걸렸습니다. 광주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한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들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민주주의 중 하나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평소에 제 학생들에게 말하는 점은 한국, 지금의 서울에서 일어난 강하고 견고한 민주주의의 기둥은 광주에서 죽은 사람들의 피로 완성되었다는 점입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에 어떠한 의미를 지닐까요?

    도널드 베이커: 경고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는 않겠죠. 한국은 변했으니까요. 절대로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역적인 차별은 여전히 존재하죠. 광주 사람들은 그들이 한 일에 대해 존경 받아야 합니다. 광주 사람들을 모욕해서는 안 되며 그들의 억양에 대해 조롱해서도 안 됩니다.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광주시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은 광주가 했던 일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광주를 아시아의 모델로 여겨야 합니다. 제가 가르치고 있는 대학에는 홍콩 학생들이 많아요. 홍콩 학생들이 중국 정부에 반해 시위를 할 때 그들은 광주 성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죠. 이를 자랑스러워해야 합니다. 한국은 국민들이 정말로 민주주의를 원할 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광주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자랑스러워해야 합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 교수님께는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도널드 베이커: 제 인생을 바꿔놨죠. 살면서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광주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았고 많은 시체들도 봤죠. 시체를 봤던 경험은 절대 잊을 수 없습니다. 생존자의 얼굴을 본 것을 절대 잊을 수 없습니다. 이는 제가 역사를 연구하는 방법을 바꾸었습니다. 더 걱정스럽죠. 저는 주로 1910년대에 끝난 조선시대에 대해 연구했어요. 그래서 실제 시체를 다룬 적이 없었죠. 하지만 광주사태를 경험하고 난 뒤에는 근대 역사에 대해 더 집중했죠. 과거에 행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점에서 역사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광주에서 일어났던, 나에게 주어진 일을 통해 역사에 대해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정확한 점을 써야 한다는 조급함이 생겼죠.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말입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광주는 저에게 제 2의 고향입니다. 그 일은 저를 많이 변화시켰어요. 저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죠. 억압 받는 것들과 불의에 대해 더 생각하게 했으며 권력의 진실을 말하는 것에 더 집중하게 했습니다. 광주가 저에게 가르쳐준 것을 절대 잊지 못합니다. 특히 그들의 용기를요. 저도 그러한 용기를 가지고 싶어요. 다시 말하지만 제가 목격한 그 끔직한 일을 절대 잊지 못하고 한국이 어떻게 다시 살아났는지에 대해 절대 잊지 못합니다. 자랑스러운 민주주의로요.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 중 하나는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가 미국으로 추방당했을 때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정말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이었죠. 그리고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을 보면서 마침내 지역적 차별이 줄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또 다른 행복했던 순간은 2017년 5월 현 문재인 대통령이 광주를 방문해 광주 사람들과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를 때였습니다. 광주 사람들의 고통이 인정받고 광주 사람들이 그들이 한 일을 자랑스러워했으며 한국 사람들이 그들이 한 일을 인정하고 한국 역사의 아주 자랑스러운 순간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폴 코트라이트

    평화 봉사단에서 근무할 당시 광주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폴 코트라이트: 광주는 저에게 머물고 싶은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한 곳입니다. 그곳 음식을 정말 좋아했어요. 사람들도 항상 호의적이었고 저를 환영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광주에 친구들이 많았어요. 제가 광주에 대해 좋았던 점은 사람들과 제가 가장 좋아하는 전라남도의 반찬들이었습니다. 광주에 있던 것들을 참 좋아했죠.

    박사님께서는 5.18에 관해 외국인으로서 첫 회고록을 출간하기도 하셨는데요. 회고록을 쓰게 된 동기가 있을까요?

    폴 코트라이트: 회고록을 쓰기로 결심한 이유는 미국 사람들이 이 사건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한국 역사뿐 아니라 미국을 위해서도 중요했고, 미국 대사관과 미국 정부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응한 부분에서 범한 실수에 대해 미국인들이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회고록을 쓰고자 했던 저의 근본적인 이유였습니다. 지난 5월 한국에 방문했을 때 한국 친구들은 미국인뿐 아니라 한국인들 역시 제 이야기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제게 말했죠. 그들 생각에 저는 이 충격적인 사건에 대한 독립적인 관찰자였던 것입니다. 작년 저는 회고록을 한글로 번역하는 것이 가치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미국인이나 서양 사람들을 위한 영어 버전과 한국 사람들을 위한 번역본을 출시하는 것이었죠.

    1980년 광주에서 당신이 보고, 듣고 느꼈던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요?

    폴 코트라이트: 이 민주화 운동과 이것에 대한 지지가 광주에서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남지역, 즉 광주 주변의 나주나 목포와 같은 시도 광주처럼 많이 관여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부분에 대해 더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광주 자체 내에서는 폭동이나 절도도 없었고 혼란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원해 거리를 청소하고 요리를 도우며 사람들을 수송했습니다. 광주를 최대한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광주 시민들은 엄청난 노력을 쏟았습니다. 사실 혼돈이 아니라 협력이었습니다.

    5.18 당시 헬기 사격에 대해 알고 계신 것이 있다면요?

    폴 코트라이트: 광주에서의 제 경험을 토대로 헬리콥터 사건이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 눈으로 보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외신 기자들과 일할 때 광주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번역하면서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는 것이 더 분명해졌었습니다. 그리고 작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이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의 여부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이 제 결론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지 여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는 사실이 조금 놀라웠습니다. 제 경험상, 이 사건이 실제로 발생한 것은 분명합니다.

    아직도 한국에는 광주 민주화 운동을 부정하거나 왜곡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으신가요?

    폴 코트라이트: 우리는 1980년대로 돌아가 사건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어느 누구도 정정할 수 없습니다. 그 사건을 목격한 사람으로서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이해해야 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것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전두환이 말한 그 이야기는 거짓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 점을 빨리 이해하고 진실이 무엇인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앞서 회고록을 쓴 이유가 한국인 그리고 미국과 같이 다른 국가에도 그 당시 광주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전하고 싶어서라고 하셨습니다. 최근 미 국무부가 한국 정부에서 요청 받은 5·18민주화운동 관련 기밀문서 중 일부를 공개했는데, 한국에서 일어난 이 일에 대해 알리는데 또 다른 방법으로 미국 정부가 도울만한 방법이 있을까요?

    폴 코트라이트: 제가 직접 읽어 본 미국 대사관에서 보내진 전보나 워싱턴 D.C로 보내진 전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이 변질되었습니다. 제 말은 5.18당시 전보는 그 당시 일어난 일에 대한 전두환의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철저히 그의 관점에서 작성된 것이죠. 하지만 5.18이 끝난 뒤엔 많이 바뀌었습니다. 대사관은 그것들이 거짓 전보임을 인식했고 다행인 것이었죠. 그 당시 미국 대사관이 솔직하게 이 사건은 끔찍한 재앙이며 잘못된 대응이라고 해야 했던 것입니다. 전두환에게 더 강력하게 그것이 끔찍한 사건이며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40년이 지난 지금, 미국 현 정부에서는 매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그랬다면 좋았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공감하고, 이해하며, 그들을 기리고 존경하는 것을 한국인들에게 알리는 것이 제 자신뿐 아니라 그 당시 한국에 있었던 다른 외국인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그 사건에 참여했던 사람들 뒤에 서서 광주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한 치유가 계속되기를 바라야 합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 박사님께 어떤 의미로 남아있습니까?

    폴 코트라이트: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고통 받았다는 점에서 저에게는 아주 힘든 시기였습니다. 아주 힘들었고 오랫동안 저는 이 일을 제 기억 속에서 지우려 노력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제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정말 힘들 일이었고 제 남은 인생을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거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제 아들도 다 컸고, 저는 은퇴했죠. 이제 그때와는 다르게 과거를 보고 있습니다. 그 당시 분노, 두려움, 좌절의 시기였고 이제 그 사건은 한국과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었기 때문에 5.18로 인한 제 경험을 되돌아보고 있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았지만 그 고통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일어난 변화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그래서 사건에 대한 제 관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지금은 아주 자랑스럽습니다. 아주 운이 좋았던 거죠. 그때와는 다르게 현재의 제가 느끼는 점입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상처 받은 사람들, 이 일로 희생당한 사람들이나 그 가족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폴 코트라이트: 광주사람들뿐 아니라 한국의 모든 사람들, 제 자신, 평화 봉사단 자원자들 그리고 광주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에게 그 시기는 정말 힘든 시기였고 우리는 그 시기를 통해 배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일로부터 무언가를 배웠고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배울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러한 배움을 실제로 받아들이고 우리의 자녀들과 손자들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를 적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고 과거 사건을 바꿀 수도 없지만 그 일을 받아들이고 우리의 일부로 만들며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으로 한국 미래의 일부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윌리엄 에이모스

    첫 번째 질문은 평화 봉사단에서 근무할 당시 광주의 모습은 어떠했나요?

    윌리엄 에이모스: 솔직히 말하자면 광주를 그렇게 자주 가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목포에 있었고 그 다음에 안양으로 옮겼기 때문이죠. 광주 자체에서는 며칠 정도만 머물렀어요. 그래서 그 질문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드릴 말씀이 많이 없어요. 물론, 전라남도에는 몇 달 머물렀기 때문에 그 지역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긴 하죠. 특히 목포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압니다.

    외국인들이 평화봉사단에 자원해서 한국으로 왔죠. 평화 봉사단에 있던 사람들에게 광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나요?

    윌리엄 에이모스: 불행히도 그 일이 거의 끝나기 전까지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광주항쟁이 발발했을 당시 저는 서울에서 가까운 안양에 살고 있었고 뉴스나 신문과 같은 매체로 뉴스를 접할 수가 없었죠. 그 지역에 있던 봉사단 사람들의 입을 통해 조금씩 그 소식이 전해졌지만 항쟁이 끝날 때까지 거의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광주사태에서 유명한 팀 원버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죠. 팀 원버그는 광주에서 막 돌아왔었고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광주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했죠.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광주에서 일어난 만행과 끔찍한 일들에 대해 정말 경악을 금치 못했죠. 이 일에 대해들은 뒤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죠.

    *팀 원버그(Tim Warnberg): 1980년 당시 봉사활동으로 광주에 온 미국 청년 팀 원버그. 5·18 당시 외신기자 통역, 시신 수습 등의 활동을 했으며 "광주항쟁은 자발적인 시민저항"이라는 분석 보고서를 출판하기도 했다.

    그와 식사를 하면서 들은 이야기는 어떠한 것이었나요?

    윌리엄 에이모스: 그 일이 있은 후 몇 년 뒤 그가 한국 학술지에 쓴 글의 일부분이었어요. 제가 그에게 들었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광주항쟁은 금남로에서 일반적인 시위로 시작됐죠. 그리고 최루가스가 거리를 덮쳤고 항쟁 초반부터 아주 잔혹했다는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기 시작했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게 되었죠. 사람들은 항쟁에 참여해 저항했고 더 많은 사람들이 몰리면서 전두환은 광주로 엄청난 수의 병력을 보냈고 그들은 엄청난 무력으로 시위를 끝내려고 했던 것 같아요.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소설을 쓰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소설을 쓰고자 했던 동기가 무엇인가요?

    윌리엄 에이모스: 그 일은 제 주변에서 일어났던 가장 엄청난 일이었기 때문에 글로 썼습니다. 그리고 중대한 사건이 일어날 때 본능적으로 이를 역사의 한 부분으로 만들기 위해 글을 적었습니다. 미국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었고 탄압에 맞서 항쟁하는 사람들의 믿을 수 없는 극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이는 다른 문화 국가 사람들도 읽을 수 있는 혁명에 대한 위대한 역사적 사실에 바탕한 소설의 기반이 되고 작가의 시점에서 볼 때 이 사건은 정치적 혼란과 항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극적인 이야기라는 좋은 조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인 입장에서 일어난 일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전달할 수 있는 거죠. 그리고 발생한 비극을 전달할 수 있는 이야기를 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제가 소설을 쓰게 된 이유입니다.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한국에는 광주 민주화 운동을 부정하거나 왜곡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작가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으신가요?

    윌리엄 에이모스: 가끔은 정치적인 부분을 뒤로 미루어야 할 때가 있다고 말하고 싶네요.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물리적이고 문서화된 기록, 사진, 사람들의 증언, 그리고 실제로 일어났던 수많은 이야기들을 살펴봐야 합니다. 그 당시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봐야 합니다. 전두환이 지시한 계엄령과 탄압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상처 받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아직도 그들에게 5월은 아픔으로 남아 있습니다.

    윌리엄 에이모스: 그들이 겪은 고통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느 누구도 오늘날의 한국 민주주의가 위대하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동아시아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민주주의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는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희생된 사람들로 이루어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들을 잃은 것에 대해 유감스러움을 표하고 싶습니다. 세상은 그들의 죽음을 슬퍼해야 하고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당신께 광주 민주화 운동이 어떤 의미로 남아 있습니까?

    윌리엄 에이모스: 지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정권에 있는 미국인으로서 그 어느 때보다 이 운동이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현재 미국은 박정희와 전두환과 같은 권위주의적 성향을 가진 대통령이 있기 때문에 과거 상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이 이 운동에 대해 느끼고 있습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을 생각해보면 끔직한 일들이 그 곳에서 일어났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결국 민주주의가 승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결국 선의의 사람들이 이긴 것이죠. 박정희와 전두환 대통령의 끔찍한 정권 하에서도 한국에서 선의의 사람들이 승리했고 이들은 어디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광주는 영감의 원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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