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명랑시사] ‘유학생 간첩단’ 피해자 “교도관 발자국 소리로 죽음 가늠하던 사형수 시절이 가장 힘들었다”

TBS 명랑시사

jeongwjpd@hanmail.net

2021-08-12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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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용 인용시 TBS <명랑시사 이승원입니다>와의


    인터뷰 내용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방송 : 2021. 8. 12. (목) 18:10~20:00 (FM 95.1)


    ● 진행 : 이승원 시사평론가


    ● 대담 : 김성만 씨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 피해자)








    ‘유학생 간첩단’ 피해자 “교도관 발자국 소리로 죽음 가늠하던 사형수 시절이 가장 힘들었다”








    - 구미 유학생 간첩단, 학생운동 억압하기 위해 사건 조작해 대대적으로 홍보한 사건


    - 13년 복역... 고문으로 온몸에 살색이라곤 없고, 아랫입술 깨물어 피 나올 만큼 힘들었어


    - 사형 확정수로 보낸 2년 3개월, 교도관 발자국 소리로 가늠해야하는 공포 속에 살아


    - 공소장 간첩죄 실체 없어 재심 청구... 괴로운 기억 풀어헤치기 고통스러웠어


    - 검찰, 1심 무죄에도 북한 대사관 간 것과 여행경비 받은 것 죄 물어야 된다고 항소해


    - 인생의 대부분을 간첩이라는 굴레 속에서 살아, 사건 관계자 전부 대인기피증 걸릴 정도


    - 36년 만 대법원 무죄 선고 듣고 인생 옥죄던 족쇄가 풀리겠구나 생각








    ▶ 이승원 : 전두환 정권 당시 여러 가지 조작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조작 사건 이른바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 피해자들이 무려 36년 만에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는데요. 오늘 인터뷰에서는 피해자 김성만 씨 직접 연결해서 이야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 김성만 : 네, 안녕하세요.





    ▶ 이승원 : 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일단 축하드립니다.





    ▷ 김성만 : 네, 고맙습니다.





    ▶ 이승원 : 네. 자세한 얘기 나누기 전에요, 선생님.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 잘 모르시는 분들도 많이 계실 것 같아요. 좀 설명을 해 주시면 어떨까요?





    ▷ 김성만 : 그 당시는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으로 우리가 민주화된 길에 들어섰는데 그 1, 2년 사이에 상당히 학생운동과 시민운동이 거셌어요. 그 당시에 이제 저희 사건이 적발된 건데 제 경우에는 동유럽에 있는 북한 대사관에 가서 그 사람들과 토론을 한 것이 적발된 것인데 여기에 이제 이런저런 간첩행위를 했다고 저한테 고문을 가하고 사건 자체를 조작하고, 그다음에 저와 같이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을 전부 다 간첩단 일원으로 묶어서 전두환 정권이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발표한 거죠.





    ▶ 이승원 : 네.





    ▷ 김성만 : 그러니까는 한 마디로 학생운동, 시민운동을 억압하기 위하여 사건을 조작해 가지고 대대적으로 홍보를 한 사건입니다.





    ▶ 이승원 : 네. 그래서 지금 선생님께서는 당시 사형을 선고 받았고, 그리고 13년 2개월 동안 복역을 하신 거죠?





    ▷ 김성만 : 그렇습니다.





    ▶ 이승원 : 네, 이 사건으로. 엄청나게.





    ▷ 김성만 : 그러니까는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았고요. 사형 확정수로서 2년 3개월을 지내다가 그다음에 특별 감형을 받아서 무기징역이 됐고 토탈 13년 2개월을 복역하고 나왔습니다.





    ▶ 이승원 : 네. 사실 이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고통스러울 텐데요. 어쨌든 많은 시간 이제 고초를 겪으신 거잖아요. 당시 뭐 떠올리기 어려우시겠지만 가장 큰 고통, 이게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좀 전달해 주시겠습니까?





    ▷ 김성만 : 그 당시요?





    ▶ 이승원 : 네, 당시에요.





    ▷ 김성만 : 뭐 안기부에서 두드려 맞을 때는 온몸에 살색이라고는 없었고요. 제가 고문을 참느라고 제 스스로 아랫입술 깨물어서 아랫입술에서 피가 나오도록 그 힘든 과정을 겪었고요. 그다음에 조작된 사건 내용으로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은 다음부터는 2년 3개월 동안 사형 확정수 생활을 했는데 인혁당 사건은 그다음 날 관계자들을 전부 다 사형 집행해서 죽이지 않았습니까?





    ▶ 이승원 : 네, 그랬죠.





    ▷ 김성만 : 저 역시 이제 다음 날부터 사형 집행이 될지 안 될지를 마음 졸이며 사는 그런 세월이었는데 우리나라는 이 사형 집행을 미리 예고를 안 해줘요. 영화에서 보면 언제 사형 집행된다 그러면 그 전날 목욕도 하고 옷도 단정하게 입고 하는데 우리는 그냥 문을 따면 나가서 죽는 건데 그게 사형 집행 날은 굉장히 조용합니다. 뭐 옆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으니까는 그 구치소에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단지 들리는 건 사형수를 집행하기 위하여서 끌어내려고 교도관들이 열 몇 명 정도가 그냥 한꺼번에 몰려다니는 집단적인 발자국 소리가 저벅저벅 소리가 나는데요. 그게 이제 점점점점 크게 들려오면 제 앞으로 오는 거고 만약에 제 앞에서 발걸음이 멈추면 끌려 나가서 죽는 건데 조금조금씩 작아지면 다른 사람 끌어내러 간 거고, 그게 이제 한 30분 정도 지나면 또다시 시작됩니다. 한 사람 집행해 가지고 그 죽는 것 확인하기까지 한 30분 걸리니까요. 사형수 시절이 가장 힘들었다고 봐야죠.





    ▶ 이승원 : 네. 매 순간 고통스러운 그 불안한 상황을 2년 3개월 동안 확정수 생활을 하신 거네요.





    ▷ 김성만 : 그렇습니다.





    ▶ 이승원 : 그 석방되기까지 과정도 굉장히 힘들었다고 들었고요. 일단 석방 이후에 지난 2017년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 피해자들이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당시 재심 청구를 결심하게 된 계기를 설명해 주시죠.





    ▷ 김성만 : 저희 사건은 공소장에 당시에 나와 있는 것 자체가 무슨 책방에서 책 산 거가 그냥 뭐 편지한 걸로 되고, 길거리에서 데모 구경한 게 무슨 (*05:10)한 걸로 되고, 길거리에서 데모 구경한 게 무슨 ( )한 걸로 되고 이래서 간첩죄의 내용이 실체가 없어요.





    ▶ 이승원 : 네.





    ▷ 김성만 : 그래서 이제 다시 재심을 청구하게 되었고, 그다음에 저와 관련된 학생들은 제가 동유럽에 있는 북한대사관을 방문했던 사실도 모르는데 그걸 다 듣고 다 같이 간첩행위를 하자고 이렇게 모의한 것처럼 돼서 간첩단이 되었기 때문에 제 밑에 학생들, 공범들도 다 재심을 해서 억울한 걸 밝혀야 되겠다고 이렇게 뜻이 모아져서 재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 이승원 : 네. 그런데 재심이라는 게 사실은 이게 받아들여지는 것도 힘들고 그 과정도 굉장히 오래 걸리셨잖아요.





    ▷ 김성만 : 네.





    ▶ 이승원 : 2017년 당시 재심을 청구한 이후에 몇 년 동안 과정 속에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어떤 부분이었습니까?





    ▷ 김성만 : 네. 제일 힘들었던 건 이제 재심 법정에서 다시 한 번 저의 억울한 점을 진술해야지 되는데 과거의 사건이라는 건 정말 30 몇 년 동안 머릿속에 이렇게 딱 담아 가지고 봉해놔서 조금도 그 기억이 새어나오지 못하도록 하면서 살았거든요. 너무 괴로우니까.





    ▶ 이승원 : 네.





    ▷ 김성만 : 그런데 재심 과정에서 그걸 이제 풀어 헤쳐나야 되는데 한 15분 정도만 생각하거나 서류를 읽어도 너무너무 가슴이 뛰고 막 힘들고 그래 가지고 한 15분 읽은 다음에는 막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마음을 진정하고 다시 보고 이런 식으로 과거의 사건을 이렇게 떠올리면서 진술하기가 정말 힘들었고, 또 법정에서는 당시에 전두환 군사정권 하에 그 사건이라는, 그 재판이라는 건 뒤에 안기부 직원들이 쭉 앉아있는 상태에서 제 진술을 듣는 건데 생사여탈권을 자기네들이 쥐고 있다고 그러고, 또 그게 또 사실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비위에 어긋나는 말을 할 수가 없거든요, 법정이라고 하더라도. 그런데 그 법정 기록을 다시 읽다 보니까 제가 안 지은 죄도 법정에서 지었다고 진술하는 그런 기록을 보면서 그때의 제 자신이 너무 불쌍하고 그래 가지고 며칠을 또 울기도 하고 그랬어요. 재심이라는 게 옛날 사건 과거의 기억, 힘들었던 기억을 다시 되살리는 법정에서 다시 하나하나 살피고 이렇게 한다는 것이 그것 자체가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 이승원 : 지난 2020년 그러니까 작년이었군요. 재심 1심에서 선생님께서 35년 만에 무죄 판단을 받으셨어요. 그런데 이해가 안 되는 건 당시 검찰 측에서 김성만 선생님 그리고 양동화 선생님 두 분에게 항소를 했지 않습니까?





    ▷ 김성만 : 그렇습니다.





    ▶ 이승원 : 그 이유가 뭔가요?





    ▷ 김성만 : 그 제 경우에는 북한 대사관을 방문해서 그 사람들하고 토론을 했고, 그다음에 여행경비를 지원을 받았는데 그리고는 검찰 측에서 그 외에 저의 어떤 간첩활동이든 아니면 북을 이롭게 하기 위한 활동이든 아니면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를 해치기 위한 활동이든 이런 걸 하나도 재심 과정에서 제시를 하지 못했어요. 증인을 스무 명 넘게 불러 가지고 다 해봤지만 전부 다 조작일 뿐이기 때문에 제시를 못했으니까 단지 북한 대사관을 간 것, 그다음에 여행경비로 금품을 받은 것, 이 두 가지만 가지고 이것은 죄를 물어야 된다 해서 항소심으로 넘겼는데 항소심에서도 역시 그것은 인정이 된다고 하더라도 어떤 범죄행위가 전혀 없기 때문에 검사 측으로부터 제출된 입증된 범죄행위가 없기 때문에 무죄를 유지한다고 그랬고, 상고심에서도 역시 검사의 상고를 기각한 거죠.





    ▶ 이승원 : 네. 어쨌든 당시도 검찰의 판단이 잘못된 건 당연하고요. 이번에도 역시 잘못된 판단이었군요.





    ▷ 김성만 : 네.





    ▶ 이승원 : 선생님, 지난 7월 29일 목요일에 대법원에서 상고를 기각한다, 이 한 문장을 듣기 위해서 이렇게 오랫동안 싸우신 거잖아요.





    ▷ 김성만 : 네.





    ▶ 이승원 : 많은 생각이 드셨을 텐데 어떠셨나요?





    ▷ 김성만 : 제가 인생의 대부분을 이 간첩이라는 굴레 속에서 살았어요. 술자리에 가도 농담 삼아서 쟤는 간첩이야, 이러면서 술을 먹으니까 그 참 그런 자리에 가고 싶겠습니까? 저희 저뿐만 아니라 저희 사건 관계자들 전부 다 대인기피증에 걸려서 이렇게 몇 십 년을 살아왔는데 이제 그 인생을 이렇게 꽉 옥죄고 억누르고 있었던 이 모든 것이 이제는 이 족쇄가 풀려나가는구나. 이제는 풀리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이승원 : 네, 알겠습니다. 그동안 너무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고생 많이 하셨고요. 어쨌든 늦었지만 축하를 드립니다. 오늘 고맙습니다.





    ▷ 김성만 : 네, 감사합니다.






    ▶ 이승원 : 네. 지금까지 구미유학생 간첩단 피해자 김성만 씨와 이야기 나눠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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